1966년 가난하던 시절, 꽃다운 나이의 한국의 젊은 여성들이 ‘백의의 천사’라는 이름으로 독일 병원에 취업하는데 산파역을 맡았던 이수길 박사. 간호사 파독과 관련된 일을 접고 다시 학문에 열중하던 어느 날 갑자기 간첩이 되어 중앙정보부원에 의해 납치된다. 모진 고문 끝에 무혐의로 풀려나기는 했지만 그는 동백림 간첩단 사건을 평생 잊지 못한다. 다시 가족의 품으로 독일에 돌아온 그는 본인과 가족의 신변 안전을 위해 독일에 귀화했다. 이 박사는 오랫동안 과거사를 가슴에 묻어두고 살아왔다. 그러나 그의 나이 79세, 이제 지난 이야기들을 양파 껍질 벗기듯 하나씩 하나씩 벗겨내기 시작했다. 그는 말한다. 시대가 달라진 것이 분명한 것 같다고.
- 고문 후유증으로 다리가 약해져 휠체어를 타야만하는 이수길 박사 ⓒ뉴스한국
재독한인(이하 재독) : 그 동안 공안사안에 대해 침묵을 지켜 오다가 사실을 밝히기로 심중의 변화가 오게 된 특별한 동기가 있었나. 이수길 박사(이하 이수길) : 1993년에 제1회 KBS 해외동포상 사회봉사부문을 수상하게 되었다. 당시 김영삼 대통령은 수상자들을 부부동반으로 모두 청와대로 초청했다. 그 때 배석해 있던 공보수석이 뜬금없이 대통령에게 이 박사가 동백림 사건으로 고생을 참 많이 했다고 말을 꺼내자 대통령이 관심을 보이며 당시 사건을 물어보기에 그 때 일을 설명했다. 내 이야기를 다 들은 김 대통령은 “다음에는 그런 일이 절대 있을 수 없습니다”라고 힘주어 말했다. 그래서 용기를 얻었다. 그 다음부터는 마음 놓고 말할 수 있었다.
이영자 여사(이하 이영자) : 그 전에는 얘기하지 못했다. 노태우 대통령 시절만 해도 겁이 나서 말을 못했다. 묻는 사람도 없었지만…
(참조 : 동백림 간첩단 사건은 1967년, 독일과 프랑스로 건너간 194명에 이르는 유학생과 교민, 예술인, 지식인 등이 동베를린의 북조선 대사관과 평양을 드나들고 간첩교육을 받으며 대남적화활동을 했다고 주장, 혐의자들을 중앙정보부 요원들이 강제로 납치해서 대한민국으로 연행하여 재판에 회부한 사건을 말한다.
이 사건은 정부가 정치적 목적으로 사실보다 부풀린 사건으로 판명되었다. 이들 중에는 작곡가 윤이상과 화가 이응로, 황성모 교수도 포함돼 있었다. 국제법을 어기면서까지 불법으로 자행된 이 사건으로 당시 서독정부는 국교단절도 단행하려고 할 만큼 외교문제로 비화되었다.
1967년 12월 3일 선거 공판에서 관련자 중 34명에게 유죄판결이 내려졌으나 대법원 최종심에서는 간첩혐의로 유죄판결을 받은 자는 없었다.동백림 사건에 대한 중정의 수사착수는 당시 박 대통령이 1967년 5월 17일 대학교수였던 임석진 씨와의 직접 면담을 통해 ‘고백’을 들은 직후라고 진실위는 밝혔다. 박 대통령은 당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철저히 수사하라”고 말했다. 그러나 진실위는 “우방과 주권침해 시비를 가져올 연행을 최소한 대통령에게 보고, 승인 받지 않고 중정 독자적으로 추진했을 가능성은 희박하다”고 말해 박 대통령이 수사착수 지시 뿐 아니라 불법해외연행 사실을 사전에 알고도 묵인했을 가능성을 강하게 시사했다.)
- 동백림간첩사건 혐의자로 강제 연행되었던 사람들(슈테른지에 보도) ⓒ이수길박사
재독:동백림 간첩단 사건 연루자로 납치를 당하게 된 일부터 소상히 설명해 달라. 이수길:대사관에 근무하는 양두원 참사관이 어느 날 정보부 사람들하고 ‘마인츠’ 우리 집으로 날 찾아 왔다. 서로 아는 사이라 사전연락 같은 것은 없었고 그냥 인사차 온 거라고 했다. 같이 온 사람 중 한사람만 초면이었다. 내 처가 해준 밥을 먹고 양 참사관이 2차를 가자고 해서 마인츠와 가까운 ‘비스바덴’으로 가서 한 잔 하기로 하고 집을 나섰다.내 차로 앞장을 설 테니 내 뒤를 따라 오라고 하니 “그러지 말고 한 차로 갑시다” 하기에 정보부원 3명과 함께 양 참사관 차를 타고 출발했다. 그런데 당초 가기로 했던 비스바덴으로 가지 않고 ‘빙엔’ 방향으로 가기에 왜 이쪽으로 가느냐 했더니 “촌스럽게 비스바덴으로 가지 말고 바트 노이나하로 가자”는 것이었다. 그곳 카지노에서 한 시간 가량 룰렛을 하면서 놀았다.밤 12시쯤 되자 그 사람들이 “지금 바로 마인츠로 되돌아 갈 수 없으니 일단 대사관으로 갔다가 마인츠로 데려다 주겠다”해서 그렇게 하라고 했다. 그런데 대사관에 도착해 보니까 어느 틈엔가 동행했던 양 참사관과 일급 차장은 없어져 버렸다. 그리고는 그날 처음 알게 된 정보부원이 날 데리고 대사관 건물의 다락방 노무관실로 안내해 주었다.
(참조 : 당시 독일의 수도는 본이었고, 대한민국 주독 대사관도 본에 있었다. 양두원 참사관은 대사관에 파견 근무하던 중앙정보부원으로 현재 국내에 거주하고 있다. 비스바덴은 헤센 주(州) 주도로 마인츠와 인접해 있다. 빙엔은 마인츠에서 북쪽으로 15km 정도 떨어진 라인 강변의 전경이 아름다운 관광도시다. 바트 노이나하는 마인츠와 본 사이에 위치하고 있는 휴양도시로서 카지노가 있다.)
20~30분가량 후에 그가 다시 들어오더니 나에게 다짜고짜 하는 말이 “당신 북한에 갔다 왔지? 이북 사람들을 만나고 다녔으니 나하고 한국에 좀 가자”는 것이었다. 놀란 마음을 추스른 나는 “지금 한국에 갈 수 없다. 4월 1일부터 마인츠 방사선과에서 새로 공부를 시작했고 지금 아무 말 없이 가버리면 난 해고된다. 그럼 내 처하고 아이 둘을 누가 먹이냐. 난 못 간다.” 그렇게 항변했다.
그러자 그는 뺨을 때리고 욕하면서 담뱃불로 내 얼굴을 지지려고 했다. 그것도 부족해서 내 지팡이를 뺏어들더니 사정없이 패기 시작했다. 그의 매질을 손으로 막다가 결혼반지가 깨져 어디론가 날아가 버렸고 이 손가락(왼손 가운데 손가락을 보이며)도 그때 맞아서 굽었다.
결국 한국에 가겠다고 하자 다른 수사관이 들어와 입가에 피를 닦아주며 “그러게 진작 간다고 하지 괜히 고집 부리다가 얻어맞기만 하지 않았냐”고 하더라.아내에게 연락도 못하고 다음 날 아침 7시쯤 대사관을 나와 함부르크 공항으로 향했다. 운전자, 정보부원과 나 이렇게 셋이었다. 가는 동안 지팡이, 와이셔츠, 넥타이 등을 새로 사 주었다. 내 지팡이는 나를 때릴 때 부러졌고 옷과 넥타이는 피로 얼룩져 입을 수 없었다.
함부르크 공항에 가보니 함부르크 총영사를 비롯해서 독일 사람도 상당수 나와 있었다. 그들은 내가 왜 끌려가는지 알고 있는 듯했다. 정보부원이 아무소리 하지 말라고 경고를 주었다. 말하면 죽는다고 위협을 가했다. 임시여권도 어느 틈에 다 만들어 놓았다. 그 여권을 지금도 가지고 있다. 그들이 알아서 탑승 수속을 했고 나는 그냥 따라갔다.일본 하네다 공항에 도착해서 하룻밤 자고 그 다음날 서울에 도착했다. 서울에 도착하자 바로 앰뷸런스에 태워 어디론가 데리고 갔다. 학생기숙사로 불리는 중앙정보부 이문동 분실로 끌려간 것이다.
재독:당시 이 박사 단독연행이었나 아니면 다른 사람들도 함께 강제 송환되었나. 이수길:독일에서 모두 16명이 납치되었는데 대체로 한 번에 3~4명씩 데리고 나간 것 같다. 내가 끌려 갈 때는 쾰른에 사는 배준상과 기센에 사는 최정길, 그리고 나 이렇게 세 명이었다. 배 씨는 법학박사이고 후에 귀국해서 대학 교수를 지냈다. 최 씨는 작곡가 윤이상 씨가 한국에서 공부시킨다고 데리고 온 사람인데, 최 씨의 부친과 윤 씨는 친구사이로 윤 씨가 북한에 갔을 때 최 씨의 부친을 만나 남한에 있는 그의 아들을 독일에 데려다 교육하기로 약속했다고 한다. 배 씨는 한국인이 경영하는 중국식당에서 박정희 대통령 욕을 했다가 이 말을 들은 임석진 씨가 밀고해서 잡혀가게 된 것이다.
- 최태준 당시 본 대사관 문화과장의 사과편지
ⓒ이수길박사
재독:이 박사의 혐의사실은 무엇이었나. 이수길:당시 동백림 사건 조사위원회가 작성한 나에 대한 혐의점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내가 북한이 포섭한 간첩이라는 혐의였고, 다른 하나는 내가 공공연히 공산주의를 찬양하여 반공법을 위배했다는 점이었다.
전자에 대해서는 프랑크푸르트에 거주하는 한국인들 몇몇이 이북을 가보니까 이수길도 이미 포섭되어 있더라는 말을 근거로 한 것이고, 후자에 대해서는 내 경험을 들은 사람들이 사실을 와전해서 나를 음해한 것이다. 이 같이 억울한 일 때문에 정보부에 붙들리게 되었다.
내가 북한에 포섭된 인물 운운하는 것은 나 보다 먼저 잡혀간 사람들이 만들어 낸 말로 내 알 바 아니다. 그런데 북한 찬양설은 한 가지 사건 때문에 만들어진 것이다.
어느 해 겨울인데 박사학위를 마무리하고자 베를린에 다녀 올 일이 있어 운전을 하고 가는데 갑자기 눈이 많이 왔다. 눈길에 차사고가 났는지 앞차가 브레이크를 밟기에 나도 따라서 급히 브레이크를 밟았는데 그만 미끄러져 펜스에 꽝 부딪쳤다. 타이어 두개가 펑크 나서 마침 지나던 사람들이 경찰을 불러주어 동독경찰관이 왔다.
경찰관들이 직접 나서서 바퀴 하나는 스페어타이어로 바꿔주고 다른 하나는 근처 포츠담에 가서 바람을 넣어가지고 와서 끼워 주었다. 감사해서 수고비를 주려고 하니까 인민을 위해 당연한 일을 한 것이라며 사양했다.
이 일을 후에 임석진, 정규명 씨 등에게 말한 적이 있는데 그 얘기를 전해들은 정보부는 마치 내가 공산당을 찬양한 것처럼 둔갑시켜 반공법 위반으로 잡아넣으려 했다. 웃기는 일 아닌가. 그러나 그 시절에는 가능했다.
또 프랑크푸르트에 사는 간호사들에게 이북 잡지가 배달되는 일이 자주 있었다. 나는 독일 경찰에 이 책은 불온서적이니 배달되지 않도록 조치를 취해 달라고 신고한 적이 있었다. 정보부에 끌려갔을 때 내가 빨갱이가 아니라는것을 증명하기 위해 이 사실을 진술했다.정보부에서 독일 대사관에 확인을 요청하자 당시 주독 대사관 문화과장이었던 최태준 영사가 자기는 모르는 사실이라며 출장 중이었다고 발뺌을 했다.
그러더니 내가 다시 독일에 돌아오니까 사과편지를 보내왔다(사진 참조). 후에 경찰에 확인서 발급을 요청했더니 확인서를 보내주었다(사진 참조). 나는 북한이나 심지어 북한 대사관에 간 적도 없다.
재독:부인께서는 이 박사 실종을 언제 알았나. 그리고 어떤 조치들을 취했나. 이영자:그 당시 프랑크푸르트에서 한국인들이 행방불명 됐다고 독일 신문에서 떠들썩하게 보도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우리도 놀라서 이게 어떻게 된 일이냐고 얘기하고 있을 때였다.그렇긴 해도 남편이 잡혀갔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저녁에 나간 사람이 아침이 되어도 안 들어오니까. 혹시 차 사고가 났나 싶어 병원장에게 전화를 걸어 교통사고가 났는지 알아봤다. 그리고 대사관에 물어보면 알 수 있을 것 같아 전화도 했다. 그런데 다음 날인가 독일 형사들 3명이 우리 집에 들이 닥쳤다. 나와 아이들의 신변을 보호해 주려고 온 것 같았다.
남편의 경우는 이미 마인츠 사회에서 알려진 사람이라서 그런지 독일기자들이 매일 같이 와서 인터뷰를 요청했는데 그들의 질문은 주로 남편이 간첩인가, 남편이 간첩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나, 그 동안 함께 살면서 남편에게서 이상한 점을 발견한 것은 없었나, 이런 것을 물어왔다.
그래서 만일 그랬다면 내가 몰랐겠느냐. 내 남편은 간첩일 수가 없다. 남편이 간첩이었다면 나라도 벌써 무슨 조치를 취했을 것이라고 답변했다.어떤 기자들은 당신 남편이 간첩이 아니면 그냥 이렇게 있지 말고 아이들을 안고 방송에 나가 내 남편 살려달라고 호소해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래서 “그럴 필요 없다. 나는 기다릴 것이다. 내 남편은 꼭 돌아올 것이다”고 말한 기억이 난다. 독일인들은 남편이 간첩 누명을 쓰고 납치되어 갔는데 부인이라는 여자가 어찌 저렇게 천연스레 있냐고 내 입장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았고 답답한 여자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여러 번 시도 끝에 대사관 정보부사람하고 통화가 됐다. 그래서 어디 갔느냐 한국에 갔느냐, 이북에 갔느냐 했더니, 박 대통령 취임식에 초대받아 갔기 때문에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그런데 내가 그 초대장을 보여 달라고 했더니 일반인에게 보여주면 안 되는 문서라며 이 박사에게만 보여주고 바로 불살라 버렸다고 했다. 아주 나쁜 사람이다.
(참고 : 박정희는 1967년 7월 15일에 제6대 대통령(1967~1971)에 취임했다. 정보부 사람이란 서독대사관 파견 근무 중인 중정요원 양두원 참사관을 말한다.)
나는 그때 신문에 계속 이런 저런 남북한 관련 기사가 나오고 그러니까 처음에는 이북에 붙들려 간 줄 알았다. 그래서 두 번째로 다시 정보부 사람에게 전화했더니 나보고 “여자가 가만히 있지 않고 웬 말이 많냐”며 호통을 쳤다. 내가 남편이 납치되었다는 사실을 정확히 알게 된 것은 신문에 보도된 기사를 보고난 후였다. 당시 우리는 최덕신 대사와 매우 가까이 지냈다. 하지만 최 대사는 한 번도 얼굴을 보이지 않았다. 최 대사도 우리를 도울 수 없는 처지였을 것이다. 그래서 이해를 했다.
- 이 박사가 북한의 불온서적이 간호사들에게 배포되지 못하도록 조치를 취해 달라는 요청을 독일경찰에 접수했다는 경찰측 확인편지. ⓒ이수길박사
재독:그런데 독일 사회에서는 어떻게 한국인들의 실종 사실을 알게 되었나. 이수길:김종대라는 하이델베르크에서 독문학 공부하던 유학생이 있었다. 이 사람을 한국에서 나온 기관원들이 붙들어 갔는데, 안 가겠다고 버티니까 태권도하는 교민을 동원해서 강제로 대사관에 납치해 갔다. 정보부원에게 구타당하면서도 김종대는 하숙집 주인에게 한국에 다니러 간다고 알려주어야 하니까 간단한 편지라도 쓰게 해달라고 하니까 수사관이 허락을 했다.그때 쓴 편지를 하숙집 주인하고 박사과정에서 같이 공부하던 독일인 친구 라스케에게 보냈다.
그런데 여기서 김종대의 기지가 발휘되었다. 바로 편지 속의 표현인데 ‘나는 카프카 같은 신세가 됐다. 지금 나는 한국에 가니까 찾지 마라, 잘 있어라’ 라는 부분이었다.
편지를 받아 본 독일인 친구가 아무래도 내용이 심상치 않다고 판단을 하고 일주일이 지나도록 김종대가 나타나지 않자 편지를 들고 프랑크푸르터 룬트샤우 신문사로 갔다. 기자와 상의한 끝에 실종기사로 발표하게 된다. 그러나 이 기사에 독일사회가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코리안 한 명 없어진 것이 뭐 그리 대수냐 하는 분위기였다.
(참고 : 프랑크푸르터 룬트샤우(Frankfurter Rundschau)는 진보성향의 독일 유명 일간지. 보수적인 프랑크푸르트 알게마이네 짜이퉁(Frankfurter Allgemeine Zeitung)과 함께 프랑크푸르터의 대표적 신문이다. 김종대는 하이델베르크에서 문학박사를 취득하고 단국대학교 독어독문학과 교수를 역임하고 정년퇴직했다. 김종대는 감시자가 보고 있는 상황에서 사실대로 표현하지 못하고 문학도답게 카프카의 재판을 빗대어 글을 썼던 것이다.)
그런데 얼마 있다가 다시 한국의 소아과의사 이수길, 정규명 등 한국인 5명이 사라졌다는 기사가 다시 룬트샤우에 발표되었다.그러자 이번에는 독일이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이처럼 한국인 실종기사가 연이어 게재된 데에
는 한 독일인 기자의 남다른 기자정신과 판단력 때문이었다. 바로 이 기사를 쓴 룬트샤우 기자의 노력이 동백림 사건 연루자 16명의 목숨을 건졌다. 왜냐하면 이 기사가 나오자마자 다음 날부터 독일 전국 언론들이 벌떼 같이 들고 일어나 앞 다투어 보도하기 시작했고, 이어서 독일경찰의 수사가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독일정부도 주권침해와 국제법을 근거로 한국정부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라스케라는 독일인과 룬트샤우 기자 이 두 사람이야말로 한국인 16명의 생명의 은인이라고 말할 수 있다. 독일 경찰은 이미 한국인 열 몇 명이 집에 안 들어오고 있다는 보고를 받아 놓고 있었다. 실종신고가 모두 접수됐고 분명히 인지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꼼짝 않고 있다가 언론에서 터트리니까 그때서야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그 때 언론의 힘을 실감했다.
재독:독일정부나 경찰, 검찰은 어떤 조치들을 취했나. 이영자:경찰에 출두하라고 해서 경찰서에 갔더니 많은 광부 사진을 늘어놓고 나보고 아는 사람 있으면 지적하라고 했다. 아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다고 했다. 시간이 가면서 독일 정보부측에서 남편이 지금 어떻게 되고 있다고 계속 소식을 전해 주었다. 진행상황을 알려주어 남편 근황을 듣게 되었다.
이수길:독일 정부는 주권침해를 이유로 나를 비롯한 우리를 불법 납치한 대사관 공관원들을 독일에서 추방했다. 특히 독일 야당에서는 한국정부와 국교단절을 해야 한다는 강경한 입장을 표명했다. 또 16명을 강제 납치하는 데 가담한 교민들. 그러니까 차량운전으로 협력했거나 무력을 행사한 사람들을 색출해서 모두 경찰 유치장에 넣었다.
재독:이문동 중정 분실에서 당시 받았던 취조와 고문의 실상을 소개해 줄 수 있는가. 이수길:제일 먼저 묻는 것이 이북에 간 적이 있느냐 하는 것이었다. 선전문은 네가 만든 거냐는 질문에 당연히 안했다고 대답했고, 그러자 고문이 시작됐다. 고문의 첫 단계는 물고문이었다. 물고문은 우선 사람을 침대 같은 데에 뉘여 놓고 수건을 얼굴에 덮고 물을 입 위로 쏟아 붓는다. 견디기 힘들다. 호흡이 어렵고 자칫 물이 폐로 들어갈 수도 있어서 위험하다.가장 견디기 어려운 고문이 전기고문이다. 전기선을 양손 새끼손가락에 각각 감는다. 한 사람은 물을 먹이고 다른 한 사람이 야전용 전화기 손잡이를 돌려 전기를 일으킨다. 손잡이를 빙빙 돌릴 때마다 전기가 팍팍 꽂힌다. 악랄하게 할 때는 한 쪽 선은 손가락에 그리고 다른 한 쪽 선은 생식기에 접속하고 전기를 넣는 것이다. 그러면 대개 정신이 나가고 기절해 버린다.
보통 의자에 앉혀놓고 전기고문을 하는데 전기가 몸에 들어오면 그 충격 때문에 누구나 다리가 부들부들 떨게 되어있다. 그 당시 나는 왼쪽 다리가 마비상태여서 떨지 않았다. 고문하는 사람들은 그걸 모르고 다리가 떨릴 때까지 전기의 강도를 높였다. 정신을 잃고 나중에 깨어나서 사정을 얘기하니까 왜 진작 말하지 않았냐고 핀잔을 주었다.그러면서 오른쪽 다리도 마저 마비시켜 놓겠다고 겁을 주며 원하는 대답을 유도했다. 이북에 간 사실을 실토하라고 해서 ‘이북에 갔다 왔다’고 쓰고, 만난 사람을 말하라고 해서 “누구를 만났다고 쓰면 됩니까”하고 물으니까 이원창을 만났다고 쓰라고 시켰다. 그런 방식으로 그들이 원하는 시나리오가 만들어졌다.
- 1967년 7월 3일 독일 일간 프랑크푸르터 룬트샤우에서 최초로 한국인 5명이 실종되었다는 보도기사. 이 기사가 나오자 독일 전역에서 한국인들이 정보부원에 의해 본국으로 납치되었다는 보도들이 잇따랐다.
ⓒ이수길박사
재독:중앙정보부의 고문취조 이후 석방되기까지 과정을 설명해 달라. 이수길:일주일간 고문을 하더니 서대문형무소 미결수 감옥으로 보냈다. 여기서 3일 가량 죄수복을 입고 지냈다. 3일 후 정보부원 한 사람의 감시 아래 사보이 호텔에 연금되었다. 독일신문이 한국인 실종을 연일 떠들고 있어서 압력을 받아 호텔로 연금 조치한 것이다.황성모 씨가 내가 이북의 불온선전물을 취급했다고 허위자백을 하는 바람에 정보부의 수사가 계속되었다. 아무튼 고문을 받던 몸이 편안한 호텔방에서 지내게 되었으니 고마운 일이었다. 그리고 중정에서 동백림 사건을 공식 발표하던 날 호텔에서 나왔다. 이후 얼마간 친가에 머물며 독일로 귀환할 날을 기다렸다.이처럼 내가 특별한 대우를 받은 것은 순전히 나와 김형욱 부장의 개인적인 친분관계 때문인 것으로 안다. 내가 김 부장의 큰 아들이 지뢰를 밟았을 때 도와준 것을 잊지 않고 은혜를 갚은 것으로 이해한다. 물론 나는 억울하게 납치되어 왔으니 이 같은 대우에 고마워할 일은 아니다.다만 김 부장의 나에 대한 특별한 배려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리고 싶다.
(참고 : 황성모 교수는 독일 뮌스터대학 수학, 서울대학교 사회학과 교수를 역임했다. 학술단체 민족주의 비교연구회가 북한의 지시로 데모를 선동하고 정부 전복을 꾀했다는 이유로 동백림 사건에 연루됐는데 고문에 못 이겨 이수길 박사가 북한의 불온문서를 취급했다는 허위자백을 한 것으로 추정된다.)
재독:석방 후 독일로 귀환하는 과정에 어려움은 없었나. 이수길: 하루라도 한국에 있고 싶지 않았다. 속히 가족에게 돌아가려고 여행사를 찾아가 독일행 비행기 표를 예약하려고 했다. 여권이 없었던 나는 정보부에다 연락해서 여권을 달라고 했더니 마음대로 떠날 수 없다며 알아서 보내줄 때까지 참고 있으라고 했다.그러다 드디어 7월 19일 연락이 왔다. 내일 출발하라는 것이다. 출발 하루 전날 헤링 주한 독일대사가 나를 만나러 왔다. 독일대사는 반공사상이 투철한 우익으로 독일 사정을 상세히 설명해
주면서 독일에 가거든 한국정부를 비난하지 말라고 충고해 주었다.
‘내의가 살에 더 가깝다’는 독일 속담을 예로 들면서 한국에서 고문 받은 사실을 말하지 않는 것이 가족을 위해서 좋을 거라고 했다. 동경에서 비행기를 갈아타고 프랑크푸르트로 오는데 어떤 젊은 독일인이 내 옆으로 와서 독일일간 빌트지 기자라고 자신을 소개하면서 사실은 동경에서부터 나를 기다리고 있었고, 프랑크푸르트 공항에 도착하면 독일 기자들이 기다리고 있을 테니 말조심하라고 당부했다. 만일 거기서 말 잘못하면 영영 당신 나라와 등지게 될 것이라고 했다. 비행기 안에서 많은 생각을 했다.
재독:프랑크푸르트 공항에서는 어떤 일들이 일어났나. 이수길: 공항에 도착하니까 각 언론사 기자들이 백 명 가량 모여 있었다. 예상한대로 공항에서 성명서를 발표해야 했다. 나는 ‘양 참사관이 내가 북한과 연락이 되어 있다고 한국 정부가 혐의를 두고 있으니 한국에 가서 해명하는 것이 좋겠다고 해서 자진해서 함부르크에서 비행기를 타고 한국에 갔으며, 고문 없이 조사만 받고 호텔에 연금되었다가 무혐으로 풀려났노라’고 성명을 발표했다.
내 발표를 들은 독일 측 기관원들이 나를 보고 잘 처신했다고 했다. 당시 한독 간 국교 단절 위기에 있었고 국제법을 어기면서 독일 거주민을 강제로 연행한 만큼 독일주권이 무시된 것이 이슈로 떠올랐기 때문에 이를 수습하는 방법으로 이런 성명이 요청된 것이다.
우리를 납치하는 데 협조한 광부들, 태권도 사범들이 그 동안 모두 색출되어 경찰에 체포 구금되어 있었는데 내가 자진해서 갔다고 하니까 그 다음날로 풀려났다. 아울러 경찰은 더 이상 수사할 명분이 없다며 사건종결을 결정했다. 내가 돌아온 며칠 후에 박성조가 독일로 돌아왔다. 그런데 박성조도 기자회견에서 나처럼 발표를 했다. 일이 이런 방향으로 수습되자 독일정부도 한국과의 국교단절 계획을 철회했다.
(참고 : 박성조는 강제로 연행된 것이 아니라 자진 귀국했는데, 정보부원이 북한대사관 방문을 사유로 조사를 요구하자 당시 일본 고베에 외교관으로 나가 있던 장인에게 자문을 구해서 장인이 한국에 다녀오라는 권유를 받아들여 자진해서 다녀왔다. 그는 사상적으로 공산주의자가 아니라 젊은 객기로 북한대사관에 가서 인삼주 먹고 온 것뿐이었다.)
재독:독일로 무사히 귀환한 후 신변의 모든 일이 다시 예전처럼 정상적이 되었나, 아니면 한인사회나 독일사회에서 생활하는 데 어떤 변화가 일어났나. 이수길: 예상치 못했던 사태가 발생했다. 공항에서 기자회견한 내용 때문에 또다시 어려움에 처했다.북한을 다녀왔거나 혐의가 짙어서 풀려나지 못한 사람들의 측근들이 내가 독일귀환 성명에서 사실대로 폭로했다면 윤이상 씨 같은 사람들이 모두 풀려날 수 있었을 거라는 것이다.왜냐하면 독일은 예정대로 여론에 힘입어 한국과 국교단절을 감행했을 것이고 이어서 국제여론을 환기시켜 불법 구금자들에 대한 구명운동을 벌여서 풀려나게 했을 텐데 좋은 기회를 수포로 만든 내가 배신자라며 공격하고 몰아붙였다.
이들은 항의에 그치지 않고 나를 중상 모략하는 소송을 걸어 우리 내외를 어렵게 했다. 그러나 결국 우리가 승소했고 오랜 시간에 걸쳐 정상으로 돌아갔다.
- 1967년 독일 15대 뉴스에 오른 이수길 박사의 납치와 석방 사건 ⓒ이수길박사
재독:휠체어는 언제부터 이용하기 시작했나. 고문으로 인한 후유증인가. 이영자:남편은 젊어서는 불국사에서 석굴암까지 걸어갈 만큼 건강이 좋았다. 어느 해인가 겨울부터 휠체어를 타기 시작했는데 점점 다리가 약해져 눈길에 미끄러져 다칠까봐 내가 권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날수록 점차 고문 후유증이 나타나더라.
이수길: 독일환자들은 대부분 내가 고문을 당해 다리를 저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당시 언론에서 그렇게 보도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본래 어려서 소아마비를 앓아서 잘 걷지 못한다고 둘러댔다.
이영자:그 때는 남편이 고문당해서 손가락이 휘어졌다거나 다리를 심하게 절게 됐다는 말을 못했다. 60년대 70년대 그 때는 감히 그런 말을 할 수 없는 시절이었다.
재독:김형욱 중앙정보부장은 어떻게 알게 되었나. 이수길:1962년도에 프랑크푸르트 대학병원 정형외과의 조수로 있을 때였다. 5.16혁명이 일어난 후 국가재건최고회의 최고위원이 된 김형욱이 5명의 동료 최고위원들과 함께 독일 시찰 명분으로 프랑크푸르트에 온 일이 있었다.
그때 임석진 일행의 여행 가이드를 했다. 차가 없는 임석진이 손님들을 인솔하고 다니면서 대중교통수단을 이용하는 것이 불편했던지 나보고 함께 다니면서 구경하자고 제안했다.
당시 유학생 중에는 유일하게 나만 오펠 레코드라는 차를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내 차로 김형욱 일행을 3일 프랑크푸르트 인근을 구경시켜주고 공항에도 데려다 주었다. 훗날 보니까 중앙정보부장이 되어 있더라.
(참고 : 오펠(Opel)은 미국 GM사의 독일현지법인이며 레코드는 대우의 레코드와 같은 차종이다. 임석진은 1956년 독일유학, 하이델베르크대학을 거쳐 프랑크푸르트대학에서 1961년 철학박사학위 취득, 헤겔 전공자, 귀국 후 명지대학 철학과 교수로 재직하다 정년, 현재 명지대 명예교수다.)
그런데 간호사 독일취업 건으로 1965년도에 한국에 나갔는데, 파독 간호사 선발 문제로 나와 보사부 사이에 옥신각신하면서 신문에서도 파독 간호사와 관련된 보도들이 많이 나갈 때였다.아마 김형욱이 신문을 보고 안 것 같았다. 사람을 통해 나를 중앙정보부로 데려가서 그를 만났는데 무척 반기면서 어려운 일이 있으면 찾을 것이지 왜 연락 안 했느냐고 했다. 정보부장이 하도 높다고 하기에 연락할 생각도 못했다고 했다.
(참고 : 김형욱(金炯旭), 1925~1979, 해도 신천 출생, 육사 8기, 국가재건최고회의 최고위원, 1963~1969 제4대 중앙정보부장, 1973년 미국으로 망명, 코리아게이트 사건이 발발하자 미 연방하원 프레이저 청문회에 출석해 박정희 정권의 비밀스러운 사건을 폭로, 1979년 10월 파리에서 행적이 묘연, 여러 가지 사망설이 떠돌고 있음. 저서 <대지의 가교, 1971>, <공산주의의 활동과 실제, 1972>)한국에 체류하는 동안 정보부차를 타고 다니면서 업무를 보게 배려해 주어서 덕분에 128명의 간호사들의 독일 비자와 출국수속을 빨리 처리할 수 있었다. 나에게는 참 큰 도움이었다.
재독: 김형욱 정보부장과 이 박사는 남다른 친분관계가 있었는데 이 같은 돈독한 관계가 형성되는 특별한 계기가 있었나. 이수길:자연스럽게 서로 연락을 주고받았다. 김 부장 자택으로 초대를 받아서 식사대접도 받고, 김 부장이 독일에 오면 우리 집에 들렀다.특별히 가까워진 계기는 사냥사건 때문이었다. 김 부장이 어느 날 큰아들을 데리고 일선 지역으로 사냥을 갔는데 그만 실수로 아들이 지뢰를 밟아 발가락이 두개 없어진 사고가 일어났다. 그래서 내가 치료를 도와주고 발가락이 두 개 없는 발에 맞는 신을 제작해서 보내주었더니 김 부장이 고마워했고 이 일을 계기로 친해졌다.
(참고 : 당시 발가락을 다친 김형욱의 큰아들 정환은 후에 미국으로 건너가 신학을 공부하고 목회를 하다가 7~8년 전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다.)
재독:동백림 사건 이후에 김형욱을 만난 일은 있는지. 이수길:만났다. 김 부장이 여기(독일)와서 여러 번 만났다. 동백림 사건과 관계없이 개인적인 친분관계는 계속되었다.김형욱 씨도 나중에 그 사건에 대해 말하면서 당시 부하직원들이 내가 간첩두목이라고 계속 주장을 하니까 자기로서도 어쩔 수 없었다며 못 도와줘서 미안하다고 사과했다. 실제로 김형욱 부장의 저서 <권력과 의무>에서 나에게 미안하다는 이야기를 쓰고 있다. 개인 서한을 보내 미안하다고 말했다. 그 편지는 지금도 보관하고 있다.
- 당시 정보부장 김형욱이 보내온 친필 사과 편지 ⓒ이수길박사
재독:박정희 대통령과 독대한 일이 있다고 들었는데 당시 무슨 얘기가 오고 갔나. 이수길:김형욱 정보부장이 주선해 박정희 대통령과 독대할 수가 있었다. 45분간 얘기를 나누었다. 물론 간호사 파독과 소아마비협회 창설 이야기도 했다.그 당시 한국에 나가 있는 동안 내가 주축이 돼서 한국의 지도자급 인사들 중 소아마비를 앓은 판사, 변호사, 의사, 교수 등과 함께 소아마비협회를 만들었다. 그리고 1966년도에 초대회장을
맡았다. 그 때 한국에 신고된 소아마비환자만 10만 명이 있었다. 보사부에 등록되지 않은 사람들까지 합하면 훨씬 더 많았을 것이다. 과거에 소아마비 환자들은 학교에 들어가기 힘들었다. 취직은 말할 것도 없고.대통령에게 소아마비협회를 창설했는데 앞으로 해야 할 일이 많으니 도와달라고 했다. 박 대통령은 만년필과 종이를 가져 오더니 소아마비가 어떻게 걸리는 거냐고 그림을 그려가며 자세히 설명해 달라고 해서 그렇게 했다. 그리고는 도와주겠노라고 약속을 했고 그 후 약속을 실행에 옮겨 정립회관이라는 재활기관을 설립해 주었다. 한국소아마비협회 산하 재활치료기관으로 워커힐 옆에 지금도 있다.
그런데 지난번 한국에 가보니 정립회관 창립 당시 참여했던 사람들이 아직도 있지만 본래의 취지대로 운영하는 것 같지 않고 이상한 방향으로 흐르는 것 같더라.
재독:임석진 씨는 동백림 사건의 중심에 있던 인물인데 어떤 처벌을 받았나. 이수길: 임석진은 동백림 사건 밀고자다. 당시 그의 자백을 들은 박정희 대통령은 그의 안전을 책임지겠다고 했고 실제로 그는 사면되었다.
재독:사건 후 임석진 씨는 피해자들에게 잘못했다고 사과했나. 이수길:그런 일 없다. 임석진은 자기가 대통령에게 고발했기 때문에 우리들이 살았지, 그렇지 않았다면 다 죽었을 거라고 말하는 사람이다. 대통령에게 고발을 안 하고 있다가 혹시 탄로가 나서 잡혀들어 갔다면 다 죽었을 것 아니냐며 자기야말로 생명의 은인이라고 주장한다.서양의 선진의학을 공부하기 위해 1959년 혈혈단신으로 독일유학길에 오른 열혈청년 이수길 씨는 이제 고희를 훨씬 넘긴 할아버지가 되었다.
고문 후유증으로 약해진 다리 때문에 휠체어를 타고 다니지만 여전히 매우 건강한 모습이었으며 장시간의 대담에도 전혀 지치지 않고 시종 미소를 잃지 않는 여유 있는 모습이었다.대담과 인터뷰에는 부인 이영자 여사(71)도 배석했다. 이 여사는 1963년 한국에서 이수길 박사를만나 결혼한 후 줄곧 독일에서 고락을 함께 하고 있다. 이 박사 내외는 자녀를 2남 2녀 두었는데 모두 의과대학을 졸업시켰다. 현재는 두 자녀만 의사로 활동하고 있다. 이 박사는 지금도 마인츠에서 소아과 전문의로 진료를 보고 있다.
최근 한국기자협회가 이 박사를 대신해서 동백림 사건 무혐의에 따른 고문 수사 그리고 그에 따른 경제적 정신적 피해 등 과거에 당한 불이익에 대하여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했다.배상금이 나오면 이 박사는 그 돈을 기자협회에 기증하는 한편 기자협회에서는 <이수길 상>을 제정하여 한국의 기자 중에서 용감한 기자를 선정하여 수상하기로 했다고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