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툴바

  블로그   태그   위치로그   이웃로그   방명록
          
 
 
 
 
     
 
  동백림 사건 증언 - 이수길 [펌]  +   [말하고 싶다.]   |  2009/01/27 20:30

한국간호사 파독과 동백림 사건의 산 증인 이수길박사 증언Ⅱ

“1967년 동백림 간첩단 사건의 진상을 밝힌다”

2007-04-05 오전 11:07:13

[ 김운경·재독동포 저널리스트 ]

1966년 가난하던 시절, 꽃다운 나이의 한국의 젊은 여성들이 ‘백의의 천사’라는 이름으로 독일 병원에 취업하는데 산파역을 맡았던 이수길 박사. 간호사 파독과 관련된 일을 접고 다시 학문에 열중하던 어느 날 갑자기 간첩이 되어 중앙정보부원에 의해 납치된다. 모진 고문 끝에 무혐의로 풀려나기는 했지만 그는 동백림 간첩단 사건을 평생 잊지 못한다. 다시 가족의 품으로 독일에 돌아온 그는 본인과 가족의 신변 안전을 위해 독일에 귀화했다. 이 박사는 오랫동안 과거사를 가슴에 묻어두고 살아왔다. 그러나 그의 나이 79세, 이제 지난 이야기들을 양파 껍질 벗기듯 하나씩 하나씩 벗겨내기 시작했다. 그는 말한다. 시대가 달라진 것이 분명한 것 같다고.
고문 후유증으로 다리가 약해져 휠체어를 타야만하는 이수길 박사 ⓒ뉴스한국
고문 후유증으로 다리가 약해져 휠체어를 타야만하는 이수길 박사 ⓒ뉴스한국
재독한인(이하 재독) : 그 동안 공안사안에 대해 침묵을 지켜 오다가 사실을 밝히기로 심중의 변화가 오게 된 특별한 동기가 있었나.

이수길 박사(이하 이수길) : 1993년에 제1회 KBS 해외동포상 사회봉사부문을 수상하게 되었다. 당시 김영삼 대통령은 수상자들을 부부동반으로 모두 청와대로 초청했다. 그 때 배석해 있던 공보수석이 뜬금없이 대통령에게 이 박사가 동백림 사건으로 고생을 참 많이 했다고 말을 꺼내자 대통령이 관심을 보이며 당시 사건을 물어보기에 그 때 일을 설명했다. 내 이야기를 다 들은 김 대통령은 “다음에는 그런 일이 절대 있을 수 없습니다”라고 힘주어 말했다. 그래서 용기를 얻었다. 그 다음부터는 마음 놓고 말할 수 있었다.

이영자 여사(이하 이영자) : 그 전에는 얘기하지 못했다. 노태우 대통령 시절만 해도 겁이 나서 말을 못했다. 묻는 사람도 없었지만…
(참조 : 동백림 간첩단 사건은 1967년, 독일과 프랑스로 건너간 194명에 이르는 유학생과 교민, 예술인, 지식인 등이 동베를린의 북조선 대사관과 평양을 드나들고 간첩교육을 받으며 대남적화활동을 했다고 주장, 혐의자들을 중앙정보부 요원들이 강제로 납치해서 대한민국으로 연행하여 재판에 회부한 사건을 말한다.
이 사건은 정부가 정치적 목적으로 사실보다 부풀린 사건으로 판명되었다. 이들 중에는 작곡가 윤이상과 화가 이응로, 황성모 교수도 포함돼 있었다. 국제법을 어기면서까지 불법으로 자행된 이 사건으로 당시 서독정부는 국교단절도 단행하려고 할 만큼 외교문제로 비화되었다.

1967년 12월 3일 선거 공판에서 관련자 중 34명에게 유죄판결이 내려졌으나 대법원 최종심에서는 간첩혐의로 유죄판결을 받은 자는 없었다.동백림 사건에 대한 중정의 수사착수는 당시 박 대통령이 1967년 5월 17일 대학교수였던 임석진 씨와의 직접 면담을 통해 ‘고백’을 들은 직후라고 진실위는 밝혔다. 박 대통령은 당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철저히 수사하라”고 말했다. 그러나 진실위는 “우방과 주권침해 시비를 가져올 연행을 최소한 대통령에게 보고, 승인 받지 않고 중정 독자적으로 추진했을 가능성은 희박하다”고 말해 박 대통령이 수사착수 지시 뿐 아니라 불법해외연행 사실을 사전에 알고도 묵인했을 가능성을 강하게 시사했다.)
동백림간첩사건 혐의자로 강제 연행되었던 사람들(슈테른지에 보도) ⓒ이수길박사
동백림간첩사건 혐의자로 강제 연행되었던 사람들(슈테른지에 보도) ⓒ이수길박사
재독:동백림 간첩단 사건 연루자로 납치를 당하게 된 일부터 소상히 설명해 달라.

이수길:대사관에 근무하는 양두원 참사관이 어느 날 정보부 사람들하고 ‘마인츠’ 우리 집으로 날 찾아 왔다. 서로 아는 사이라 사전연락 같은 것은 없었고 그냥 인사차 온 거라고 했다. 같이 온 사람 중 한사람만 초면이었다. 내 처가 해준 밥을 먹고 양 참사관이 2차를 가자고 해서 마인츠와 가까운 ‘비스바덴’으로 가서 한 잔 하기로 하고 집을 나섰다.내 차로 앞장을 설 테니 내 뒤를 따라 오라고 하니 “그러지 말고 한 차로 갑시다” 하기에 정보부원 3명과 함께 양 참사관 차를 타고 출발했다. 그런데 당초 가기로 했던 비스바덴으로 가지 않고 ‘빙엔’ 방향으로 가기에 왜 이쪽으로 가느냐 했더니 “촌스럽게 비스바덴으로 가지 말고 바트 노이나하로 가자”는 것이었다. 그곳 카지노에서 한 시간 가량 룰렛을 하면서 놀았다.밤 12시쯤 되자 그 사람들이 “지금 바로 마인츠로 되돌아 갈 수 없으니 일단 대사관으로 갔다가 마인츠로 데려다 주겠다”해서 그렇게 하라고 했다. 그런데 대사관에 도착해 보니까 어느 틈엔가 동행했던 양 참사관과 일급 차장은 없어져 버렸다. 그리고는 그날 처음 알게 된 정보부원이 날 데리고 대사관 건물의 다락방 노무관실로 안내해 주었다.
(참조 : 당시 독일의 수도는 본이었고, 대한민국 주독 대사관도 본에 있었다. 양두원 참사관은 대사관에 파견 근무하던 중앙정보부원으로 현재 국내에 거주하고 있다. 비스바덴은 헤센 주(州) 주도로 마인츠와 인접해 있다. 빙엔은 마인츠에서 북쪽으로 15km 정도 떨어진 라인 강변의 전경이 아름다운 관광도시다. 바트 노이나하는 마인츠와 본 사이에 위치하고 있는 휴양도시로서 카지노가 있다.)

20~30분가량 후에 그가 다시 들어오더니 나에게 다짜고짜 하는 말이 “당신 북한에 갔다 왔지? 이북 사람들을 만나고 다녔으니 나하고 한국에 좀 가자”는 것이었다. 놀란 마음을 추스른 나는 “지금 한국에 갈 수 없다. 4월 1일부터 마인츠 방사선과에서 새로 공부를 시작했고 지금 아무 말 없이 가버리면 난 해고된다. 그럼 내 처하고 아이 둘을 누가 먹이냐. 난 못 간다.” 그렇게 항변했다.
그러자 그는 뺨을 때리고 욕하면서 담뱃불로 내 얼굴을 지지려고 했다. 그것도 부족해서 내 지팡이를 뺏어들더니 사정없이 패기 시작했다. 그의 매질을 손으로 막다가 결혼반지가 깨져 어디론가 날아가 버렸고 이 손가락(왼손 가운데 손가락을 보이며)도 그때 맞아서 굽었다.

결국 한국에 가겠다고 하자 다른 수사관이 들어와 입가에 피를 닦아주며 “그러게 진작 간다고 하지 괜히 고집 부리다가 얻어맞기만 하지 않았냐”고 하더라.아내에게 연락도 못하고 다음 날 아침 7시쯤 대사관을 나와 함부르크 공항으로 향했다. 운전자, 정보부원과 나 이렇게 셋이었다. 가는 동안 지팡이, 와이셔츠, 넥타이 등을 새로 사 주었다. 내 지팡이는 나를 때릴 때 부러졌고 옷과 넥타이는 피로 얼룩져 입을 수 없었다.
함부르크 공항에 가보니 함부르크 총영사를 비롯해서 독일 사람도 상당수 나와 있었다. 그들은 내가 왜 끌려가는지 알고 있는 듯했다. 정보부원이 아무소리 하지 말라고 경고를 주었다. 말하면 죽는다고 위협을 가했다. 임시여권도 어느 틈에 다 만들어 놓았다. 그 여권을 지금도 가지고 있다. 그들이 알아서 탑승 수속을 했고 나는 그냥 따라갔다.일본 하네다 공항에 도착해서 하룻밤 자고 그 다음날 서울에 도착했다. 서울에 도착하자 바로 앰뷸런스에 태워 어디론가 데리고 갔다. 학생기숙사로 불리는 중앙정보부 이문동 분실로 끌려간 것이다.

재독:당시 이 박사 단독연행이었나 아니면 다른 사람들도 함께 강제 송환되었나.

이수길:독일에서 모두 16명이 납치되었는데 대체로 한 번에 3~4명씩 데리고 나간 것 같다. 내가 끌려 갈 때는 쾰른에 사는 배준상과 기센에 사는 최정길, 그리고 나 이렇게 세 명이었다. 배 씨는 법학박사이고 후에 귀국해서 대학 교수를 지냈다. 최 씨는 작곡가 윤이상 씨가 한국에서 공부시킨다고 데리고 온 사람인데, 최 씨의 부친과 윤 씨는 친구사이로 윤 씨가 북한에 갔을 때 최 씨의 부친을 만나 남한에 있는 그의 아들을 독일에 데려다 교육하기로 약속했다고 한다. 배 씨는 한국인이 경영하는 중국식당에서 박정희 대통령 욕을 했다가 이 말을 들은 임석진 씨가 밀고해서 잡혀가게 된 것이다.
최태준 당시 본 대사관 문화과장의 사과편지
<br /> ⓒ이수길박사
최태준 당시 본 대사관 문화과장의 사과편지
 ⓒ이수길박사
재독:이 박사의 혐의사실은 무엇이었나.

이수길:당시 동백림 사건 조사위원회가 작성한 나에 대한 혐의점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내가 북한이 포섭한 간첩이라는 혐의였고, 다른 하나는 내가 공공연히 공산주의를 찬양하여 반공법을 위배했다는 점이었다.
전자에 대해서는 프랑크푸르트에 거주하는 한국인들 몇몇이 이북을 가보니까 이수길도 이미 포섭되어 있더라는 말을 근거로 한 것이고, 후자에 대해서는 내 경험을 들은 사람들이 사실을 와전해서 나를 음해한 것이다. 이 같이 억울한 일 때문에 정보부에 붙들리게 되었다.
내가 북한에 포섭된 인물 운운하는 것은 나 보다 먼저 잡혀간 사람들이 만들어 낸 말로 내 알 바 아니다. 그런데 북한 찬양설은 한 가지 사건 때문에 만들어진 것이다.
어느 해 겨울인데 박사학위를 마무리하고자 베를린에 다녀 올 일이 있어 운전을 하고 가는데 갑자기 눈이 많이 왔다. 눈길에 차사고가 났는지 앞차가 브레이크를 밟기에 나도 따라서 급히 브레이크를 밟았는데 그만 미끄러져 펜스에 꽝 부딪쳤다. 타이어 두개가 펑크 나서 마침 지나던 사람들이 경찰을 불러주어 동독경찰관이 왔다.
경찰관들이 직접 나서서 바퀴 하나는 스페어타이어로 바꿔주고 다른 하나는 근처 포츠담에 가서 바람을 넣어가지고 와서 끼워 주었다. 감사해서 수고비를 주려고 하니까 인민을 위해 당연한 일을 한 것이라며 사양했다.
이 일을 후에 임석진, 정규명 씨 등에게 말한 적이 있는데 그 얘기를 전해들은 정보부는 마치 내가 공산당을 찬양한 것처럼 둔갑시켜 반공법 위반으로 잡아넣으려 했다. 웃기는 일 아닌가. 그러나 그 시절에는 가능했다.

또 프랑크푸르트에 사는 간호사들에게 이북 잡지가 배달되는 일이 자주 있었다. 나는 독일 경찰에 이 책은 불온서적이니 배달되지 않도록 조치를 취해 달라고 신고한 적이 있었다. 정보부에 끌려갔을 때 내가 빨갱이가 아니라는것을 증명하기 위해 이 사실을 진술했다.정보부에서 독일 대사관에 확인을 요청하자 당시 주독 대사관 문화과장이었던 최태준 영사가 자기는 모르는 사실이라며 출장 중이었다고 발뺌을 했다.
그러더니 내가 다시 독일에 돌아오니까 사과편지를 보내왔다(사진 참조). 후에 경찰에 확인서 발급을 요청했더니 확인서를 보내주었다(사진 참조). 나는 북한이나 심지어 북한 대사관에 간 적도 없다.

재독:부인께서는 이 박사 실종을 언제 알았나. 그리고 어떤 조치들을 취했나.

이영자:그 당시 프랑크푸르트에서 한국인들이 행방불명 됐다고 독일 신문에서 떠들썩하게 보도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우리도 놀라서 이게 어떻게 된 일이냐고 얘기하고 있을 때였다.그렇긴 해도 남편이 잡혀갔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저녁에 나간 사람이 아침이 되어도 안 들어오니까. 혹시 차 사고가 났나 싶어 병원장에게 전화를 걸어 교통사고가 났는지 알아봤다. 그리고 대사관에 물어보면 알 수 있을 것 같아 전화도 했다. 그런데 다음 날인가 독일 형사들 3명이 우리 집에 들이 닥쳤다. 나와 아이들의 신변을 보호해 주려고 온 것 같았다.
남편의 경우는 이미 마인츠 사회에서 알려진 사람이라서 그런지 독일기자들이 매일 같이 와서 인터뷰를 요청했는데 그들의 질문은 주로 남편이 간첩인가, 남편이 간첩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나, 그 동안 함께 살면서 남편에게서 이상한 점을 발견한 것은 없었나, 이런 것을 물어왔다.

그래서 만일 그랬다면 내가 몰랐겠느냐. 내 남편은 간첩일 수가 없다. 남편이 간첩이었다면 나라도 벌써 무슨 조치를 취했을 것이라고 답변했다.어떤 기자들은 당신 남편이 간첩이 아니면 그냥 이렇게 있지 말고 아이들을 안고 방송에 나가 내 남편 살려달라고 호소해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래서 “그럴 필요 없다. 나는 기다릴 것이다. 내 남편은 꼭 돌아올 것이다”고 말한 기억이 난다. 독일인들은 남편이 간첩 누명을 쓰고 납치되어 갔는데 부인이라는 여자가 어찌 저렇게 천연스레 있냐고 내 입장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았고 답답한 여자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여러 번 시도 끝에 대사관 정보부사람하고 통화가 됐다. 그래서 어디 갔느냐 한국에 갔느냐, 이북에 갔느냐 했더니, 박 대통령 취임식에 초대받아 갔기 때문에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그런데 내가 그 초대장을 보여 달라고 했더니 일반인에게 보여주면 안 되는 문서라며 이 박사에게만 보여주고 바로 불살라 버렸다고 했다. 아주 나쁜 사람이다.
(참고 : 박정희는 1967년 7월 15일에 제6대 대통령(1967~1971)에 취임했다. 정보부 사람이란 서독대사관 파견 근무 중인 중정요원 양두원 참사관을 말한다.)

나는 그때 신문에 계속 이런 저런 남북한 관련 기사가 나오고 그러니까 처음에는 이북에 붙들려 간 줄 알았다. 그래서 두 번째로 다시 정보부 사람에게 전화했더니 나보고 “여자가 가만히 있지 않고 웬 말이 많냐”며 호통을 쳤다. 내가 남편이 납치되었다는 사실을 정확히 알게 된 것은 신문에 보도된 기사를 보고난 후였다. 당시 우리는 최덕신 대사와 매우 가까이 지냈다. 하지만 최 대사는 한 번도 얼굴을 보이지 않았다. 최 대사도 우리를 도울 수 없는 처지였을 것이다. 그래서 이해를 했다.
이 박사가 북한의 불온서적이 간호사들에게 배포되지 못하도록 조치를 취해 달라는 요청을 독일경찰에 접수했다는 경찰측 확인편지. ⓒ이수길박사
이 박사가 북한의 불온서적이 간호사들에게 배포되지 못하도록 조치를 취해 달라는 요청을 독일경찰에 접수했다는 경찰측 확인편지. ⓒ이수길박사
재독:그런데 독일 사회에서는 어떻게 한국인들의 실종 사실을 알게 되었나.

이수길:김종대라는 하이델베르크에서 독문학 공부하던 유학생이 있었다. 이 사람을 한국에서 나온 기관원들이 붙들어 갔는데, 안 가겠다고 버티니까 태권도하는 교민을 동원해서 강제로 대사관에 납치해 갔다. 정보부원에게 구타당하면서도 김종대는 하숙집 주인에게 한국에 다니러 간다고 알려주어야 하니까 간단한 편지라도 쓰게 해달라고 하니까 수사관이 허락을 했다.그때 쓴 편지를 하숙집 주인하고 박사과정에서 같이 공부하던 독일인 친구 라스케에게 보냈다.

그런데 여기서 김종대의 기지가 발휘되었다. 바로 편지 속의 표현인데 ‘나는 카프카 같은 신세가 됐다. 지금 나는 한국에 가니까 찾지 마라, 잘 있어라’ 라는 부분이었다.
편지를 받아 본 독일인 친구가 아무래도 내용이 심상치 않다고 판단을 하고 일주일이 지나도록 김종대가 나타나지 않자 편지를 들고 프랑크푸르터 룬트샤우 신문사로 갔다. 기자와 상의한 끝에 실종기사로 발표하게 된다. 그러나 이 기사에 독일사회가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코리안 한 명 없어진 것이 뭐 그리 대수냐 하는 분위기였다.

(참고 : 프랑크푸르터 룬트샤우(Frankfurter Rundschau)는 진보성향의 독일 유명 일간지. 보수적인 프랑크푸르트 알게마이네 짜이퉁(Frankfurter Allgemeine Zeitung)과 함께 프랑크푸르터의 대표적 신문이다. 김종대는 하이델베르크에서 문학박사를 취득하고 단국대학교 독어독문학과 교수를 역임하고 정년퇴직했다. 김종대는 감시자가 보고 있는 상황에서 사실대로 표현하지 못하고 문학도답게 카프카의 재판을 빗대어 글을 썼던 것이다.)

그런데 얼마 있다가 다시 한국의 소아과의사 이수길, 정규명 등 한국인 5명이 사라졌다는 기사가 다시 룬트샤우에 발표되었다.그러자 이번에는 독일이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이처럼 한국인 실종기사가 연이어 게재된 데에
는 한 독일인 기자의 남다른 기자정신과 판단력 때문이었다. 바로 이 기사를 쓴 룬트샤우 기자의 노력이 동백림 사건 연루자 16명의 목숨을 건졌다. 왜냐하면 이 기사가 나오자마자 다음 날부터 독일 전국 언론들이 벌떼 같이 들고 일어나 앞 다투어 보도하기 시작했고, 이어서 독일경찰의 수사가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독일정부도 주권침해와 국제법을 근거로 한국정부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라스케라는 독일인과 룬트샤우 기자 이 두 사람이야말로 한국인 16명의 생명의 은인이라고 말할 수 있다. 독일 경찰은 이미 한국인 열 몇 명이 집에 안 들어오고 있다는 보고를 받아 놓고 있었다. 실종신고가 모두 접수됐고 분명히 인지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꼼짝 않고 있다가 언론에서 터트리니까 그때서야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그 때 언론의 힘을 실감했다.

재독:독일정부나 경찰, 검찰은 어떤 조치들을 취했나.

이영자:경찰에 출두하라고 해서 경찰서에 갔더니 많은 광부 사진을 늘어놓고 나보고 아는 사람 있으면 지적하라고 했다. 아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다고 했다. 시간이 가면서 독일 정보부측에서 남편이 지금 어떻게 되고 있다고 계속 소식을 전해 주었다. 진행상황을 알려주어 남편 근황을 듣게 되었다.

이수길:독일 정부는 주권침해를 이유로 나를 비롯한 우리를 불법 납치한 대사관 공관원들을 독일에서 추방했다. 특히 독일 야당에서는 한국정부와 국교단절을 해야 한다는 강경한 입장을 표명했다. 또 16명을 강제 납치하는 데 가담한 교민들. 그러니까 차량운전으로 협력했거나 무력을 행사한 사람들을 색출해서 모두 경찰 유치장에 넣었다.

재독:이문동 중정 분실에서 당시 받았던 취조와 고문의 실상을 소개해 줄 수 있는가.

이수길:제일 먼저 묻는 것이 이북에 간 적이 있느냐 하는 것이었다. 선전문은 네가 만든 거냐는 질문에 당연히 안했다고 대답했고, 그러자 고문이 시작됐다. 고문의 첫 단계는 물고문이었다. 물고문은 우선 사람을 침대 같은 데에 뉘여 놓고 수건을 얼굴에 덮고 물을 입 위로 쏟아 붓는다. 견디기 힘들다. 호흡이 어렵고 자칫 물이 폐로 들어갈 수도 있어서 위험하다.가장 견디기 어려운 고문이 전기고문이다. 전기선을 양손 새끼손가락에 각각 감는다. 한 사람은 물을 먹이고 다른 한 사람이 야전용 전화기 손잡이를 돌려 전기를 일으킨다. 손잡이를 빙빙 돌릴 때마다 전기가 팍팍 꽂힌다. 악랄하게 할 때는 한 쪽 선은 손가락에 그리고 다른 한 쪽 선은 생식기에 접속하고 전기를 넣는 것이다. 그러면 대개 정신이 나가고 기절해 버린다.

보통 의자에 앉혀놓고 전기고문을 하는데 전기가 몸에 들어오면 그 충격 때문에 누구나 다리가 부들부들 떨게 되어있다. 그 당시 나는 왼쪽 다리가 마비상태여서 떨지 않았다. 고문하는 사람들은 그걸 모르고 다리가 떨릴 때까지 전기의 강도를 높였다. 정신을 잃고 나중에 깨어나서 사정을 얘기하니까 왜 진작 말하지 않았냐고 핀잔을 주었다.그러면서 오른쪽 다리도 마저 마비시켜 놓겠다고 겁을 주며 원하는 대답을 유도했다. 이북에 간 사실을 실토하라고 해서 ‘이북에 갔다 왔다’고 쓰고, 만난 사람을 말하라고 해서 “누구를 만났다고 쓰면 됩니까”하고 물으니까 이원창을 만났다고 쓰라고 시켰다. 그런 방식으로 그들이 원하는 시나리오가 만들어졌다.
1967년 7월 3일 독일 일간 프랑크푸르터 룬트샤우에서 최초로 한국인 5명이 실종되었다는 보도기사. 이 기사가 나오자  독일 전역에서 한국인들이 정보부원에 의해 본국으로 납치되었다는 보도들이 잇따랐다.
<br /> ⓒ이수길박사
1967년 7월 3일 독일 일간 프랑크푸르터 룬트샤우에서 최초로 한국인 5명이 실종되었다는 보도기사. 이 기사가 나오자 독일 전역에서 한국인들이 정보부원에 의해 본국으로 납치되었다는 보도들이 잇따랐다.
 ⓒ이수길박사
재독:중앙정보부의 고문취조 이후 석방되기까지 과정을 설명해 달라.

이수길:일주일간 고문을 하더니 서대문형무소 미결수 감옥으로 보냈다. 여기서 3일 가량 죄수복을 입고 지냈다. 3일 후 정보부원 한 사람의 감시 아래 사보이 호텔에 연금되었다. 독일신문이 한국인 실종을 연일 떠들고 있어서 압력을 받아 호텔로 연금 조치한 것이다.황성모 씨가 내가 이북의 불온선전물을 취급했다고 허위자백을 하는 바람에 정보부의 수사가 계속되었다. 아무튼 고문을 받던 몸이 편안한 호텔방에서 지내게 되었으니 고마운 일이었다. 그리고 중정에서 동백림 사건을 공식 발표하던 날 호텔에서 나왔다. 이후 얼마간 친가에 머물며 독일로 귀환할 날을 기다렸다.이처럼 내가 특별한 대우를 받은 것은 순전히 나와 김형욱 부장의 개인적인 친분관계 때문인 것으로 안다. 내가 김 부장의 큰 아들이 지뢰를 밟았을 때 도와준 것을 잊지 않고 은혜를 갚은 것으로 이해한다. 물론 나는 억울하게 납치되어 왔으니 이 같은 대우에 고마워할 일은 아니다.다만 김 부장의 나에 대한 특별한 배려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리고 싶다.

(참고 : 황성모 교수는 독일 뮌스터대학 수학, 서울대학교 사회학과 교수를 역임했다. 학술단체 민족주의 비교연구회가 북한의 지시로 데모를 선동하고 정부 전복을 꾀했다는 이유로 동백림 사건에 연루됐는데 고문에 못 이겨 이수길 박사가 북한의 불온문서를 취급했다는 허위자백을 한 것으로 추정된다.)

재독:석방 후 독일로 귀환하는 과정에 어려움은 없었나.

이수길: 하루라도 한국에 있고 싶지 않았다. 속히 가족에게 돌아가려고 여행사를 찾아가 독일행 비행기 표를 예약하려고 했다. 여권이 없었던 나는 정보부에다 연락해서 여권을 달라고 했더니 마음대로 떠날 수 없다며 알아서 보내줄 때까지 참고 있으라고 했다.그러다 드디어 7월 19일 연락이 왔다. 내일 출발하라는 것이다. 출발 하루 전날 헤링 주한 독일대사가 나를 만나러 왔다. 독일대사는 반공사상이 투철한 우익으로 독일 사정을 상세히 설명해
주면서 독일에 가거든 한국정부를 비난하지 말라고 충고해 주었다.

‘내의가 살에 더 가깝다’는 독일 속담을 예로 들면서 한국에서 고문 받은 사실을 말하지 않는 것이 가족을 위해서 좋을 거라고 했다. 동경에서 비행기를 갈아타고 프랑크푸르트로 오는데 어떤 젊은 독일인이 내 옆으로 와서 독일일간 빌트지 기자라고 자신을 소개하면서 사실은 동경에서부터 나를 기다리고 있었고, 프랑크푸르트 공항에 도착하면 독일 기자들이 기다리고 있을 테니 말조심하라고 당부했다. 만일 거기서 말 잘못하면 영영 당신 나라와 등지게 될 것이라고 했다. 비행기 안에서 많은 생각을 했다.

재독:프랑크푸르트 공항에서는 어떤 일들이 일어났나.

이수길: 공항에 도착하니까 각 언론사 기자들이 백 명 가량 모여 있었다. 예상한대로 공항에서 성명서를 발표해야 했다. 나는 ‘양 참사관이 내가 북한과 연락이 되어 있다고 한국 정부가 혐의를 두고 있으니 한국에 가서 해명하는 것이 좋겠다고 해서 자진해서 함부르크에서 비행기를 타고 한국에 갔으며, 고문 없이 조사만 받고 호텔에 연금되었다가 무혐으로 풀려났노라’고 성명을 발표했다.
내 발표를 들은 독일 측 기관원들이 나를 보고 잘 처신했다고 했다. 당시 한독 간 국교 단절 위기에 있었고 국제법을 어기면서 독일 거주민을 강제로 연행한 만큼 독일주권이 무시된 것이 이슈로 떠올랐기 때문에 이를 수습하는 방법으로 이런 성명이 요청된 것이다.

우리를 납치하는 데 협조한 광부들, 태권도 사범들이 그 동안 모두 색출되어 경찰에 체포 구금되어 있었는데 내가 자진해서 갔다고 하니까 그 다음날로 풀려났다. 아울러 경찰은 더 이상 수사할 명분이 없다며 사건종결을 결정했다. 내가 돌아온 며칠 후에 박성조가 독일로 돌아왔다. 그런데 박성조도 기자회견에서 나처럼 발표를 했다. 일이 이런 방향으로 수습되자 독일정부도 한국과의 국교단절 계획을 철회했다.

(참고 : 박성조는 강제로 연행된 것이 아니라 자진 귀국했는데, 정보부원이 북한대사관 방문을 사유로 조사를 요구하자 당시 일본 고베에 외교관으로 나가 있던 장인에게 자문을 구해서 장인이 한국에 다녀오라는 권유를 받아들여 자진해서 다녀왔다. 그는 사상적으로 공산주의자가 아니라 젊은 객기로 북한대사관에 가서 인삼주 먹고 온 것뿐이었다.)

재독:독일로 무사히 귀환한 후 신변의 모든 일이 다시 예전처럼 정상적이 되었나, 아니면 한인사회나 독일사회에서 생활하는 데 어떤 변화가 일어났나.

이수길: 예상치 못했던 사태가 발생했다. 공항에서 기자회견한 내용 때문에 또다시 어려움에 처했다.북한을 다녀왔거나 혐의가 짙어서 풀려나지 못한 사람들의 측근들이 내가 독일귀환 성명에서 사실대로 폭로했다면 윤이상 씨 같은 사람들이 모두 풀려날 수 있었을 거라는 것이다.왜냐하면 독일은 예정대로 여론에 힘입어 한국과 국교단절을 감행했을 것이고 이어서 국제여론을 환기시켜 불법 구금자들에 대한 구명운동을 벌여서 풀려나게 했을 텐데 좋은 기회를 수포로 만든 내가 배신자라며 공격하고 몰아붙였다.
이들은 항의에 그치지 않고 나를 중상 모략하는 소송을 걸어 우리 내외를 어렵게 했다. 그러나 결국 우리가 승소했고 오랜 시간에 걸쳐 정상으로 돌아갔다.
1967년 독일 15대 뉴스에 오른 이수길 박사의 납치와 석방 사건 ⓒ이수길박사
1967년 독일 15대 뉴스에 오른 이수길 박사의 납치와 석방 사건 ⓒ이수길박사
재독:휠체어는 언제부터 이용하기 시작했나. 고문으로 인한 후유증인가.

이영자:남편은 젊어서는 불국사에서 석굴암까지 걸어갈 만큼 건강이 좋았다. 어느 해인가 겨울부터 휠체어를 타기 시작했는데 점점 다리가 약해져 눈길에 미끄러져 다칠까봐 내가 권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날수록 점차 고문 후유증이 나타나더라.

이수길: 독일환자들은 대부분 내가 고문을 당해 다리를 저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당시 언론에서 그렇게 보도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본래 어려서 소아마비를 앓아서 잘 걷지 못한다고 둘러댔다.

이영자:그 때는 남편이 고문당해서 손가락이 휘어졌다거나 다리를 심하게 절게 됐다는 말을 못했다. 60년대 70년대 그 때는 감히 그런 말을 할 수 없는 시절이었다.

재독:김형욱 중앙정보부장은 어떻게 알게 되었나.

이수길:1962년도에 프랑크푸르트 대학병원 정형외과의 조수로 있을 때였다. 5.16혁명이 일어난 후 국가재건최고회의 최고위원이 된 김형욱이 5명의 동료 최고위원들과 함께 독일 시찰 명분으로 프랑크푸르트에 온 일이 있었다.
그때 임석진 일행의 여행 가이드를 했다. 차가 없는 임석진이 손님들을 인솔하고 다니면서 대중교통수단을 이용하는 것이 불편했던지 나보고 함께 다니면서 구경하자고 제안했다.
당시 유학생 중에는 유일하게 나만 오펠 레코드라는 차를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내 차로 김형욱 일행을 3일 프랑크푸르트 인근을 구경시켜주고 공항에도 데려다 주었다. 훗날 보니까 중앙정보부장이 되어 있더라.

(참고 : 오펠(Opel)은 미국 GM사의 독일현지법인이며 레코드는 대우의 레코드와 같은 차종이다. 임석진은 1956년 독일유학, 하이델베르크대학을 거쳐 프랑크푸르트대학에서 1961년 철학박사학위 취득, 헤겔 전공자, 귀국 후 명지대학 철학과 교수로 재직하다 정년, 현재 명지대 명예교수다.)

그런데 간호사 독일취업 건으로 1965년도에 한국에 나갔는데, 파독 간호사 선발 문제로 나와 보사부 사이에 옥신각신하면서 신문에서도 파독 간호사와 관련된 보도들이 많이 나갈 때였다.아마 김형욱이 신문을 보고 안 것 같았다. 사람을 통해 나를 중앙정보부로 데려가서 그를 만났는데 무척 반기면서 어려운 일이 있으면 찾을 것이지 왜 연락 안 했느냐고 했다. 정보부장이 하도 높다고 하기에 연락할 생각도 못했다고 했다.

(참고 : 김형욱(金炯旭), 1925~1979, 해도 신천 출생, 육사 8기, 국가재건최고회의 최고위원, 1963~1969 제4대 중앙정보부장, 1973년 미국으로 망명, 코리아게이트 사건이 발발하자 미 연방하원 프레이저 청문회에 출석해 박정희 정권의 비밀스러운 사건을 폭로, 1979년 10월 파리에서 행적이 묘연, 여러 가지 사망설이 떠돌고 있음. 저서 <대지의 가교, 1971>, <공산주의의 활동과 실제, 1972>)한국에 체류하는 동안 정보부차를 타고 다니면서 업무를 보게 배려해 주어서 덕분에 128명의 간호사들의 독일 비자와 출국수속을 빨리 처리할 수 있었다. 나에게는 참 큰 도움이었다.

재독: 김형욱 정보부장과 이 박사는 남다른 친분관계가 있었는데 이 같은 돈독한 관계가 형성되는 특별한 계기가 있었나.

이수길:자연스럽게 서로 연락을 주고받았다. 김 부장 자택으로 초대를 받아서 식사대접도 받고, 김 부장이 독일에 오면 우리 집에 들렀다.특별히 가까워진 계기는 사냥사건 때문이었다. 김 부장이 어느 날 큰아들을 데리고 일선 지역으로 사냥을 갔는데 그만 실수로 아들이 지뢰를 밟아 발가락이 두개 없어진 사고가 일어났다. 그래서 내가 치료를 도와주고 발가락이 두 개 없는 발에 맞는 신을 제작해서 보내주었더니 김 부장이 고마워했고 이 일을 계기로 친해졌다.

(참고 : 당시 발가락을 다친 김형욱의 큰아들 정환은 후에 미국으로 건너가 신학을 공부하고 목회를 하다가 7~8년 전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다.)

재독:동백림 사건 이후에 김형욱을 만난 일은 있는지.

이수길:만났다. 김 부장이 여기(독일)와서 여러 번 만났다. 동백림 사건과 관계없이 개인적인 친분관계는 계속되었다.김형욱 씨도 나중에 그 사건에 대해 말하면서 당시 부하직원들이 내가 간첩두목이라고 계속 주장을 하니까 자기로서도 어쩔 수 없었다며 못 도와줘서 미안하다고 사과했다. 실제로 김형욱 부장의 저서 <권력과 의무>에서 나에게 미안하다는 이야기를 쓰고 있다. 개인 서한을 보내 미안하다고 말했다. 그 편지는 지금도 보관하고 있다.
당시 정보부장 김형욱이 보내온 친필 사과 편지 ⓒ이수길박사
당시 정보부장 김형욱이 보내온 친필 사과 편지 ⓒ이수길박사
재독:박정희 대통령과 독대한 일이 있다고 들었는데 당시 무슨 얘기가 오고 갔나.

이수길:김형욱 정보부장이 주선해 박정희 대통령과 독대할 수가 있었다. 45분간 얘기를 나누었다. 물론 간호사 파독과 소아마비협회 창설 이야기도 했다.그 당시 한국에 나가 있는 동안 내가 주축이 돼서 한국의 지도자급 인사들 중 소아마비를 앓은 판사, 변호사, 의사, 교수 등과 함께 소아마비협회를 만들었다. 그리고 1966년도에 초대회장을
맡았다. 그 때 한국에 신고된 소아마비환자만 10만 명이 있었다. 보사부에 등록되지 않은 사람들까지 합하면 훨씬 더 많았을 것이다. 과거에 소아마비 환자들은 학교에 들어가기 힘들었다. 취직은 말할 것도 없고.대통령에게 소아마비협회를 창설했는데 앞으로 해야 할 일이 많으니 도와달라고 했다. 박 대통령은 만년필과 종이를 가져 오더니 소아마비가 어떻게 걸리는 거냐고 그림을 그려가며 자세히 설명해 달라고 해서 그렇게 했다. 그리고는 도와주겠노라고 약속을 했고 그 후 약속을 실행에 옮겨 정립회관이라는 재활기관을 설립해 주었다. 한국소아마비협회 산하 재활치료기관으로 워커힐 옆에 지금도 있다.
그런데 지난번 한국에 가보니 정립회관 창립 당시 참여했던 사람들이 아직도 있지만 본래의 취지대로 운영하는 것 같지 않고 이상한 방향으로 흐르는 것 같더라.

재독:임석진 씨는 동백림 사건의 중심에 있던 인물인데 어떤 처벌을 받았나.

이수길: 임석진은 동백림 사건 밀고자다. 당시 그의 자백을 들은 박정희 대통령은 그의 안전을 책임지겠다고 했고 실제로 그는 사면되었다.

재독:사건 후 임석진 씨는 피해자들에게 잘못했다고 사과했나.

이수길:그런 일 없다. 임석진은 자기가 대통령에게 고발했기 때문에 우리들이 살았지, 그렇지 않았다면 다 죽었을 거라고 말하는 사람이다. 대통령에게 고발을 안 하고 있다가 혹시 탄로가 나서 잡혀들어 갔다면 다 죽었을 것 아니냐며 자기야말로 생명의 은인이라고 주장한다.서양의 선진의학을 공부하기 위해 1959년 혈혈단신으로 독일유학길에 오른 열혈청년 이수길 씨는 이제 고희를 훨씬 넘긴 할아버지가 되었다.
고문 후유증으로 약해진 다리 때문에 휠체어를 타고 다니지만 여전히 매우 건강한 모습이었으며 장시간의 대담에도 전혀 지치지 않고 시종 미소를 잃지 않는 여유 있는 모습이었다.대담과 인터뷰에는 부인 이영자 여사(71)도 배석했다. 이 여사는 1963년 한국에서 이수길 박사를만나 결혼한 후 줄곧 독일에서 고락을 함께 하고 있다. 이 박사 내외는 자녀를 2남 2녀 두었는데 모두 의과대학을 졸업시켰다. 현재는 두 자녀만 의사로 활동하고 있다. 이 박사는 지금도 마인츠에서 소아과 전문의로 진료를 보고 있다.

최근 한국기자협회가 이 박사를 대신해서 동백림 사건 무혐의에 따른 고문 수사 그리고 그에 따른 경제적 정신적 피해 등 과거에 당한 불이익에 대하여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했다.배상금이 나오면 이 박사는 그 돈을 기자협회에 기증하는 한편 기자협회에서는 <이수길 상>을 제정하여 한국의 기자 중에서 용감한 기자를 선정하여 수상하기로 했다고 전한다.

 
TRACKBACK 0    COMMENT 0
  파독간호사 40주년을 회고하며~ 이수길 박사[펌]  +   [말하고 싶다.]   |  2009/01/27 20:25

한국간호사 파독과 동백림 사건의 산 증인 이수길 박사의 증언Ⅰ

“한국간호사 파독 40년을 회고하며”

2007-03-06 오후 4:02:59

[ 김운경·재독교포 저널리스트 ]

재독동포들의 연합단체인 ‘재독한인총연합회’는 2006년 10월 한국간호사 파독 40주년을 맞아 독일 이민사는 물론이고 한독외교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역사적 사건들과 관련하여 그 한복판에 있던 이수길 박사(78)를 초청하여 4시간여에 걸친 기념 대담을 가졌다.
주제는 주로 한국간호사 파독 과정과 실태 그리고 동백림사건에 관한 것이었다. 이 박사는 신문, 잡지 등의 보도기사와 공한과 개인 서한 등, 그 동안 본인과 관련된 거의 모든 국내외 자료들을 차곡차곡 수집해 왔으며 이날도 상당량의 자료를 근거로 답변했다. 이 박사는 증언하는 중에 연도와 수치 등을 밝혀야 하는 대목이 나올 때마다 준비해온 자료를 찾아가며 성실히 답변해주었다.
1966년 꽃다운 나이에 한국의 젊은 여성들이 ‘백의의 천사’라는 이름으로 독일 땅을 밟은 이래 꼭 40년이 지난 지금 바로 한국간호사 독일취업의 산파역을 맡은 이수길 박사에게 당시의 사정과 사건들을 직접 들어보는 것은 매우 의미 있는 일이다. 이 박사는 그 동안 가슴 속에만 간직하고 밝히지 못했던 많은 숨은 이야기와 사건 뒤에 묻혀있던 진실들을 과감하게 털어놓기 시작했다.
간호사 파독과 관련되어 세상에 떠돌던 무수한 소문들. 소문이라는 말 자체가 풍기는 부정적인 이미지가 그러하듯 이 중에는 근거 없는 낭설이나 개인의 명예와 관련된 악소문도 적지 않았다. 이번 대담은 특히 진실 규명을 위해 때때로 심층 질문도 가했으나 대담에 임한 이 박사는 어느 질문에 대해서든 거칠 것 없이 본인의 견해를 밝혔다.
프랑크푸르트 인근의 줄츠바흐 소재 도린트호텔 소 세미나실에서 열린 대담은 이곳 동포언론에 종사하는 언론인들이 패널로 참석했으며 재독한인총연합회장(안영국)이 사회를 맡았다. 다음은 이날 있었던 대담을 정리한 것이다. 단 질문자는 재독한인으로 통일키로 했다.
1965년 7월28일, 슐타이즈 병원협회장이 한국대사관에 한국간호사 취업을 주선해 달라고 요청하는 서한. ⓒ이수길
1965년 7월28일, 슐타이즈 병원협회장이 한국대사관에 한국간호사 취업을 주선해 달라고 요청하는 서한. ⓒ이수길
재독한인 : 한국인 간호사들을 파독하게 된 과정을 소상히 밝혀 달라. 우선 어떤 계기로 간호사 독일취업을 구상하게 되었나.
_ 이수길 박사 : 우연한 기회가 발단이 되었다. 마인츠 대학병원 소아과에 근무하고 있을 때였다. 아침에 회진을 돌고 올 때면 아기들이 자주 울고 있었는데 간호사들이 우는 아기들을 돌보지 못했다. 이유는 당시 내가 담당하고 있던 병동에 23명의 영아 환자들이 있었는데 배속된 간호사가 부족해서 아기들에게 그때마다 우유를 먹이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병원장 말이 당시 독일에 최소한 3만 명의 간호사가 부족한 상태이고 이로 인해 병원은 환자를 더 받지도 못하고 있는 실정이라는 것이었다. 이때 나는 한국의 간호사가 독일에 취업할 수 있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와 관련하여 한국 보건사회부에 알아보니 한국에는 간호사 자격증을 가진 3천 명의 여성들이 실직상태라고 했다. 한국으로서는 간호사 파독은 환영할 만한 일이었다. 또 내가 한국간호사의 독일 취업을 긍정적으로 생각한 것은 내 자신이 한때 수도육군병원 문관으로 근무하면서 우리 간호사들이 얼마나 친절했던지 그 기억이 생생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한국간호사들이 독일에 오면 틀림없이 환영을 받을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았다.

수백 명의 간호사를 독일에 취업시키는 일이 한 사람의 민간인 주선으로 가능했나.
_ 맨 먼저 내가 근무하던 마인츠병원에서 한국간호사 30명을 받아들이겠다고 했다. 외국인이 독일에 취업을 하려면 노동청 허가가 있어야 하므로 해당 관청인 라인란트팔츠 주 노동청에 한국인 간호사 독일취업이 가능한지 문의했다. 답변은 딱 잘라서 불가하다는 것이었다. 당시 라인란트팔츠는 보수정당인 기민련/기사련(CDU/CSU) 정권이 장악하고 있었다. 그래서 다음으로 프랑크푸르트를 알아보았다. 각 병원마다 일일이 편지를 보내며 교섭을 시작했다. 그리고 모두 11개 병원에서 총 210명을 취업시키겠다는 양해각서를 받아낼 수 있었다.

이 과정에서 당시 프랑크푸르트의 노르트베스트 크랑켄하우스 병원장 겸 병원협회장인 슐타이스 씨를 알게 되었다. 간호사 일을 계기로 그와 친분을 쌓게 되었는데 이후 슐타이스 병원협회장은 한국간호사 취업과 관련하여 독일 측 실무 책임자가 되어 이 일에 깊숙이 개입하게 되었다.

슐타이스 원장은 진보적 성향의 사민당(SPD) 당원이었고 프랑크푸르트 시장이었던 브룬데르트 박사 또한 이 때 사민당 부당수 직함을 가지고 있었다. 일이 잘 되려고 프랑크푸르트가 소속되어 있는 헤센 주가 독일에서 유일하게 사민당 정권이 들어선 때였다. 주지사와 사회부장관 등 주정부의 고위층이 우호적인 입장에서 이 사안을 긍정적으로 검토하기로 하고 협조할 것을 약속해 주었다. 정말이지 헤센 주가 아니었다면 한국간호사 파독의 물꼬를 트는 일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이 점에 관해서 지난 5월에 있었던 파독 간호사 40주년 기념일을 맞아 일간 프랑크푸르트 알게마이네 짜이퉁(FAZ) 등 독일 언론들도 당시 헤센 주(州)에서 미래를 내다보는 안목이 없었다면 한국 간호사들의 독일진출은 없었을 것이라고 논평한 바 있다.

간호사 파독에 대해 당시 주독 대사관 입장은 어떠했는가.
_ 독일 정부의 허가를 받은 후 바로 당시 본(Bonn) 소재 주독 대사관(대사 최덕신)에 가서 관련서류를 제출하고 정부가 이 일을 진행해 줄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3개월이 지나도록 아무런 조치가 없어 궁금해 하는 차에 슐타이스 병원협회장이 상기된 얼굴로 나를 찾아왔다. 그가 전하는 말에 의하면 주독 대사관에서 각 병원과 병원협회에 공한을 보내 “우리는 한국인 간호사를 독일에 취업시킬 수 없다”는 뜻을 밝혔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이유로 “독일간호사의 질이 한국간호사만 못한데다 독일의 간호사 급료가 미국간호사 급료의 삼분의 일 밖에 안 될 정도로 낮다”는 것을 들며, “이 일은 이수길 개인이 하는 일이지 정부차원에서 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덧붙였다고 했다. 그러나 나는 대사관에서 반대한 진짜 이유가 다른 데 있다고 보았다. 아마도 정부도 하지 못하는 일을 개인이 추진하는 것이 못마땅하고 공관의 자존심이 상해서 반대했을 것이라는 심증이 강하게 들었다.
(참조 : 당시 주독대사 최덕신 장군은 사석에서 이 박사의 간호사 파독사업을 지지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수길 박사는 프랑크푸르트 지역한인회에서 발간했던 월간 <한인사회>(2002년 3월호)에 게재된 기획연재 <뿌리를 찾아서> 제2편 간호사<1부>, 「한독 양국 간 직접적 민간외교 물꼬… 백의 천사들의 프랑크푸르트 공항 첫발」이라는 제목 아래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1965년 4월 16일 부활절 전 금요일에 주 서독대사 최덕신 장군 내외분이 주말을 우리 집에서 보내기 위하여 마인츠에서 오셨는데 최 장군과 나는 전과 같이 바둑을 두었으며 이 기회에 한국간호사를 서독에 취업시키는 것이 어떠한가 하고 진언하였더니 참 좋은 아이디어라고 칭찬하면서 최 대사도 적극 협력하겠으니 추진하여 보라고 당부하는 것이었다.’(15쪽)
그러나 막상 간호사 초청 취업 건이 접수되자 대사관 내부에서는 격렬한 토론이 일어났고, 결론은 ‘직접 취업알선 거부’로 방침이 정해졌다고 이 박사는 술회하고 있다. 그리고 그 이유로 세 가지를 들었다. (16쪽) 1. 서독의 봉급이 미국보다 낮다. 2. 한국간호사의 교육기간이 서독보다 길다. 3. 서독 간호사의 자격을 미국에서 인정하지 않는다. 그런데 대사관은 공식적으로는 이 같은 입장을 견지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이춘수 참사관을 통해 슐타이스 원장에게 서한을 보내 ‘귀하가 보낸 한국간호사 서독 취업에 대한 7월 28일자와 8월 2일자 서한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회신합니다. 앞으로 상기 문제에 대하여는 이 사업의 주동자인 이 박사와 전적으로 협의하기를 바랍니다. 한국대사관은 이 박사가 추진하는 이 사업을 도와줄 용의가 있습니다.’(17쪽)라고 함으로써 이중 플레이를 펼친 것이 명백히 드러났다.)
제1진 프랑크푸르트 공항도착, 1966년 1월31일 ⓒ이수길
제1진 프랑크푸르트 공항도착, 1966년 1월31일 ⓒ이수길
한국 관계당국과의 협의에 문제점은 없었나.
_ 방법은 이제 본국의 주무관청인 보건사회부에서 직접 허가를 얻어내는 길 밖에 없었다. 나는 슐타이스 병원협회장과 함께 일본항공(JAL) 프랑크푸르트지사 판매부장 빈터 씨를 만났다. 한국에 나가서 보사부장관을 만나 어떻든지 간호사 취업 건을 성사시켜보고 싶은데 비행기 표 살 돈이 없다고 하자 빈터 씨는 선뜻 왕복 비행기 표를 제공하겠다고 했다. 그 대신 일이 잘 돼 간호사들이 독일로 올 경우 일본항공 전세기를 이용해 달라는 조건이었다.

전세기 이용계약은 프랑크푸르트 시와 체결되었다. 물론 대한항공은 아직 설립되기도 전이었다. 당시 한국 왕복 비행기 표는 내 월급으로는 생활비를 절약해서 1년은 꼬박 저축해야 겨우 한 장 살 수 있을 만큼 큰돈이었다. 그리고 마인츠 대학병원의 주임교수를 찾아가 사정 얘기를 하는 한편 동경에서 열리는 세계 소아과 학회에 참가하겠다는 명분으로 한 달반 휴가를 받았다.
사전에 최덕신 대사가 소개 해준 덕분에 한국에서 이만섭, 김호철 등의 국회의원을 만났고 이 분들의 중재로 오원선 보사부장관(재임기간: 1964년 5월~1966년 4월)을 접견하는 데 성공했다. 긴장과 기대감에 벅찬 마음으로 보사부장관을 면대했으나 단 15분 만에 모든 일이 끝났다. 15분간 얘기를 나눈 오 장관은 “이 박사, 얼마든지 데리고 가시오”라고 했다. 주독 대사관의 공식 입장이 무색케 되는 순간이었다. (웃음)
(참조:이 당시 한국 왕복 비행기 티켓은 1,400달러로 당시 환율로는 대략 5,600 마르크, 지금의 유로화로 환산하면 약 2,800유로가 된다. 최덕신 대사는 귀임 후 천주교 교령을 지내다 도미. 미국에서 반체제운동을 하면서 수차례 북한을 방문하다가 끝내 부인과 함께 월북했다.)

간호사 선발은 어떻게 했나. 항간에서는 선발과정에 부정이 있었다는 불만의 목소리가 높았다는데.
_ 총 128명을 선발해야 했다. 그런데 신문에 공고를 하고 자격 가진 이들을 모집하니 약 600명가량 지원했다. 5대 1이나 되는 치열한 경쟁을 보였다. 최종심사는 보사부 간호과장과 간호협회장 그리고 나 이렇게 세 명이 보았는데 뽑힌 사람들은 거의 모두 간호대학 또는 간호전문학교 출신들로 21~24세의 젊은 여성들이었다. 그런데 최종 명단을 훑어보니 이 중에 30살이 훨씬 넘은 여성들 7~8명이 끼어 있었다. 나도 모르는 일이었다.

이 사실이 외부로 새 나가자 간호협회 총무를 비롯해 탈락된 간호사들이 벌떼 같이 들고 일어났다. “우리는 나이가 많다고 떨어졌는데 저 사람들은 어째서 합격이 됐느냐”는 것이었다. 나는 보사부 입김이 작용한 것을 알고 젊은 마음에 의협심이 발동해서 이 사람들은 못 데려 가겠노라고 겁도 없이 항의했다. 이 사건과 관련하여 당시 중앙일보는 ‘얼굴이 예쁘지 않으면 독일에 못 나간다’고 보도하기도 했다. 선발 기준을 무시하고 주무관청의 압력행사로 간호사 선발이 공정치 못했음을 비아냥거리는 고발기사였다.

이들 7명 중에는 지금 프랑크푸르트에 살고 있는 김모 씨도 있었고 양호교사도 한 사람 있었다. 양호교사는 당시 박정희 대통령 둘째 딸(박근영)이 다니는 학교에 근무했는데 영부인 육영수 여사에게 청을 넣어 명단에 오른 케이스였다. 이 같은 행태에 대해서 나는 물론 한국간호협회 등에서도 불가하다는 주장을 강하게 폈지만 결국 모두 데려오고 말았다. 당시 보사부에서 통역 일을 보고 있던 강신호 씨가 “그만 양보하지 왜 고집을 부리냐. 당신 병원에 데려다가 쓸 사람들도 아닌데 너무 그러지 말라”며 보사부 요구에 응할 것을 종용했는데 아무래도 보사부가 철회할 것 같지 않아 못이기는 체 7명을 받아드렸던 것이다.
(참조:1) 강신호(79)는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을 졸업하고(1952년) 독일 프라이부르크대학에서 의학박사를 취득했으며(1958년), 현재 동아쏘시오그룹 회장인 동시에 29대 전경련회장이다. 2) 언급한 중앙일보는 1966년 1월 14일자로 <서독 갈 간호원 8명, 예쁘지 않아 갑자기 출국보류>라는 제목으로 보도했다.)

선발과정에서 수속비 명목으로 사례비를 받은 일이 있는가.
_ 전혀 그런 일 없다. 지금 되돌아보면 당시 나는 너무 순진했던 것 같다는 생각마저 든다. 출국예정일을 한 달 가량 남겨놓고 여권수속을 시작했다. 여행사에 의뢰하면 건당 100~150불을 요구하던 시절이었다. 가난한 간호사들에겐 그럴 돈이 없었다. 내가 수고 좀 하면 되는데 싶어 자발적으로 여권수속을 대행해 주었다. 한 사람 서류 작성하는데 꼬박 30분 걸렸다. 한겨울 난로 하나 피워놓고 작업을 했던 기억이 난다. 128명 모두를 끝내고 무사히 패스포드를 받았다.

당시 간호사들이 부담한 일인당 수속비용은 여권 발급비를 포함해서 3~4천원 정도였던 것 같다. 그러나 독일 비자를 받으려면 신체검사도 받아야 했다. 지금은 이 제도가 없어졌지만 그 때만 해도 반드시 뢴트겐을 찍어야 했는데 한국에서 엑스레이 한 번 찍는데 당시 비용이 3~5천 원 정도나 되었다. 독일에서는 한 푼도 안내고 찍는 엑스선 사진을 왜 한국에서는 그렇게 많은 돈을 내야 하는지 사정을 알아보니 필름 값이 비싸서 그렇다는 것이었다.
서울대학병원에서는 만일 필름을 가져온다면 800원 실비만 받고 찍어주겠다고 했다. 나는 급히 프랑크푸르트 슐타이스 병원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필름 200장을 받아 120장을 사용하고 남은 80장은 서울대학에 기증했다.
이런 시시콜콜한 얘기까지 하는 이유는 당시 나는 간호사 128명을 무사히 독일 프랑크푸르트공항에 도착시키는 것, 이것 하나만 생각했다는 것을 말하고 싶기 때문이다. 그래야 내 비행기 표 값을 하는 것 아니겠는가. (웃음)

사실 조금만 앞을 내다보면 얼마든지 사업성이 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을 것 같다. 이후 수 천 명의 간호사들이 독일에 들어오게 되는데 혹시 사업 구상을 해보지는 않았는지. 예를 들면 비행기 티켓, 수속비 등에서 일정한 수익을 챙길 수도 있었다고 보는데.
_ 이미 말한 것처럼 나는 그런 쪽으로는 전혀 생각해 본 일이 없다. 당시 나는 128명이 무사히 비행기를 타서 독일 오는 것, 단순히 이것만 생각했다. 그리고 이후로도 간호사가 계속 독일에 나갈 수 있다는 가능성에 대해서도 전혀 예측하지 못했다. 128명만 데리고 가면 끝인 줄 알았다. 만일 그 때 간호사 송출 사업이 계속적으로 진행되리라는 것을 알았다면 혹 나도 연속사업으로 무슨 계획을 세울 수도 있었을 것이다.
도착 당일 프랑크푸르트 시장이 베푼 환영식에서 애국가와 아리랑을 부르는 간호사 제1진, 지휘자는 김인환 간호사 ⓒ이수길
도착 당일 프랑크푸르트 시장이 베푼 환영식에서 애국가와 아리랑을 부르는 간호사 제1진, 지휘자는 김인환 간호사 ⓒ이수길
왜 간호사들이 매번 128 명씩 왔나. 특별한 이유라도 있었나.
_ 그 이유는 당시 제트여객기 중에서 제일 큰 기종이 ‘DC 8’ 이었는데 총좌석수가 129석이었다. 그러니까 내 자리 하나 빼서 128명이 된 것이다. (웃음)

인간 모두가 경제적 속성을 지니고 있는데 이 박사의 순진무후하기만한 행동이 잘 이해가 안 간다. 수속비나 사례비 또는 수익사업 구상 등은 없었다고 하더라도 간호사 파독과 관련하여 어떤 혜택을 받은 일은 없는가, 또는 그런 것을 약속 받지는 않았나. 아직도 세간에는 파독 간호사와 관련하여 이수길 박사, 이종수 박사 등이 착복했다는 소문이 돌고 있다.
_ 만일 어떤 형태로든 간호사 독일취업과 관련해서 돈을 받았다면 지금 세상을 향해서 떳떳하게 얼굴을 들고 다니지 못할게다. 혜택이랄 것이 뭐가 있겠는가. 나를 통해서 독일에 온 간호사들이 친목회를 구성했는데 훗날 ‘재독간호협회’로 발전하게 되었다. 이 친목회에서 크리스마스가 되면 30마르크 정도 되는 선물 하나를 정성껏 준비해 주었는데 그것이 혜택이라면 혜택이랄까. 내가 돈 문제에 관한 한 결백하다는 것을 반증하는 사건이 있었다. 바로 동백림사건이다. 이 사건에 연루되었다. 어느 날 본 대사관으로 납치되었다가 중앙정보부로 압송되어 취조를 받을 때 그들이 나에게 말하길 “너 간호협회에서 받은 돈도 없는데 무슨 돈으로 한국에서 한 달 반씩 돈 쓰고 돌아다녔느냐. 이북에서 돈 받은 것 아니냐”고 다그치고 고문했다. 간호사 친목회는 나에게 간호사들을 위해서 많은 수고를 했는데 적어도 그 동안 들어간 전화비용만큼은 갚아야겠다며 청구하라고 해서 1,200마르크를 신청한 적이 있었는데 돈이 없다고 해서 결국 1페니히도 받지 못했다. 내가 이런 문제로 구설수에 오르내리는 것은 순전히 이종수 씨가 간호사들에게 돈을 받기 시작하면서 나타난 현상이었다. 그 전에는 교민사회에서 돈에 관한 말이 나돌지 않았다.

제 1진이 독일에 들어온 이후 계속적인 한국간호사 취업 요청이 있었는데 이수길 박사가 데리고 온 간호사는 모두 몇 명인가.
_ 모든 수속을 마치고 떠날 날만 기다리는 데 프랑크푸르트에서 슐타이스 병원장이 한국에 왔다. 깜짝 놀랐다. 그는 브룬데르트 프랑크푸르트 시장의 친서를 품에 넣고 왔는데, 친서의 내용은 간호사 300명을 더 데려오라는 것이었다. 최초의 한국간호사 128명이 비행기도 타기 전에 간호사를 더 요청한 것이었다. 요청대로 제 2진 128명을 보사부에 의뢰하고 프랑크푸르트 행 비행기에 탑승했다. 제 2진은 4월에 들어왔다. 1진과 2진 256명이 프랑크푸르트를 중심으로 병원과 양로원에 배치되었다. 이 같은 사실이 독일 신문 방송 등 언론을 타고 전국으로 보도되자 독일 전역에서 한국간호사를 원한다는 신청이 쇄도했다. 그 수가 3,000명에 달했다. 그러나 프랑크푸르트 시는 전국규모의 사업은 감당할 수 없다고 해서 이 일은 진행이 안됐다.
내가 데려온 간호사가 모두 5차에 걸쳐 간호사 628명과 간호학생 40명해서 668명, 후에 이종수 씨가 경영하는 ‘사단법인 기독교 한국난민구제회’에서 취업시킨 간호사 416명, 간호보조원이 459명, 간호학생 106명 등 모두 981명, 또 주독 대사관이 초청해서 한국 노동청을 통해 들어온 간호사가 17 명, 종로 ILI 학원을 통해서 온 사람들이 150명 그리고 천주교 종교단체(담당 아잉가 신부)에서 초청 취업된 간호학생 26명 등으로 1968년까지 한국간호요원은 총 1842명이었다. 그리고 3년 계약이 끝나서 귀국할 때 간호사들이 나가는 수만큼 교체되었는데 이때 독일병원협회가 교체인력으로 받아드린 간호사들이 자료에 의하면 간호사 4668명, 간호보조원 3417명으로 총 8085명이었다.
따라서 교체된 연인원 8000여명과 앞에서 언급한 1800여명을 합해서 1966년 1차부터 1976년 마지막 팀까지 독일에 들어온 한국의 간호요원 총계는 10032명으로 집계되었다. 그리고 1976년 5월 이후부터는 더 이상 교체인원이 선발되지 않았다. 독일정부가 여러 가지 이유로 한국간호요원의 독일 취업을 전면 금지시켰던 것이다.
(참조:이 박사는 추후 증언에서(2007년 1월 18일 자택) 위에서 언급된 1968년까지의 독일취업 간호요원 1,842명과 교체인력으로 들어온 8,085명 외에 한국 국방부에서 독일 육군병원과 교섭하여 간호장교 출신 60명 정도를 1974년과 1975년에 독일 내 몇 개 군병원에 취업시킨 일이 있다고 했다. 이 케이스로 독일에 온 간호장교 출신 김모 씨가 현재 마인츠에 거주하고 있다.)

교체인력으로 들어온 간호요원들의 독일취업실무는 독일병원협회가 직접 한국 담당기관과 접촉해서 이루어졌는가 아니면 다른 중개기관을 거쳤는가.
_ 병원협회의 위임을 받아 내가 실무를 맡았다. 1966년 1월 30일에 독일에 입국한 간호사 1진들이 계약에 따라 1968년 말로 3년 임기가 끝나게 되었다. 당시 마인츠 대학병원에는 모두 180명의 한국 간호사들이 근무하고 있었는데 계약만료가 되는 사람이 70명가량 되었다. 마인츠병원으로서는 대책이 필요했다. 그래서 대학병원장하고 독일병원협회장이 의논한 끝에 나가는 인원만큼 새 사람들을 받기로 하고 교체업무를 병원협회에 일임하게 되었다. 그리고 병원협회에서 실무를 나에게 맡겼다.
(참조:이 박사의 간호사 교체에 관한 실무는 초기 단계에만 관여했고, 이후에는 독일병원협회가 한국 담당기관과 직접 사업을 추진했다. 당시 해당지역은 헨센 주, 라인란트팔츠 주,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 주 이었다고 한다.)

제 1진 이후의 간호사 선발과 파독과정에 변화가 있었는가.
_ 변화가 있었다. 제 2진부터는 청진동에 사무실을 둔 해외개발공사(초대사장 정희섭)에서 파독간호사 업무를 전담했다. 내가 독일에서 슐타이스 씨와 함께 독일병원들이 필요로 하는 간호사 수요를 파악해서 보사부에 인원을 신청하면, 해외개발공사가 나서서 간호사 모집공고서부터 선발, 수속에 이르기까지 모든 국내업무를 맡아서 했다. 그리고 수속이 완료되면 나는 간호사들을 인솔해서 함께 비행기를 타고 독일에 오면 되었다. 따라서 제 2진부터는 이수길에 의해서 간호사 선발이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국가의 인력송출 전문기관을 통해서 간호사 파독이 이루어졌다. 이런 점에서 제 1진과는 분명한 차이가 있었다. 아무튼 파독 간호사 일과 관련해서 보사부와 갈등도 있었고 매번 일하기가 힘든 것은 사실이었다.
1966년 12월21일자 동아일보 ⓒ이수길
1966년 12월21일자 동아일보 ⓒ이수길
한국 간호사를 데려오는 일에 전념하다 보면 시간부족 때문에라도 의사로서 진료업무에 충실을 기하지 못했을 것 같은데 소속 병원에서는 별 문제가 없었나. 혹 이 박사 개인에게 어떤 변화는 없었는가.
_ 1966년 1월 30일 드디어 제 1진 간호사 128명이 프랑크푸르트 시장의 영접을 받으며 공항에 도착했다. 성대한 환영식이 있었다. 그리고 이어서 제 2진 인솔문제가 논의되었다. 부시장, 병원협회장 등이 제 2진도 내가 맡아서 해줄 것을 요청했다. 하지만 나는 직장인인데 어떻게 그렇게 자주 한국에 나갈 수 있겠느냐고 반문하자 이 분들이 나에게 새로운 일자리를 제안했다.

프랑크푸르트 시 부시장과 병원협회장의 제안은 마인츠에 있지 말고 프랑크푸르트로 오라는 것이었다. 프랑크푸르트 훽스트 병원의 소아과 과장 직책도 주고, 관사도 제공하겠다고 했다. 또 봉급도 250마르크 정도 더 많아 졌다. 나에 대한 주문은 앞으로 병원일은 할 것 없고 1년 동안 간호사 데려오는 일만 하라는 것이었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프랑크푸르트로 오는 게 좋겠다 싶어 승낙을 했다. 마인츠대학 주임교수가 또 선선히 허락을 해줘서 훽스트 병원으로 자리를 옮겨 1966년 4월 1일부터 병원 관리본부 사무실에서 근무를 시작했다. 보직은 소아과 과장(Oberarzt)이었지만 진료는 안하고 간호사 데려오는 일만 전담했다.

이 박사 외에도 외국인 학원 강사가 간호사 취업을 알선했다가 사회문제가 된 적이 있는데 이 사건에 대해서 알고 있다면 증언해 달라.
_ 1966년 벽두부터 국내 신문들이 파독 간호사와 나에 대한 기사를 앞 다퉈 보도하면서 간호사 서독취업 붐이 일자 당시 종로에 있던 ILI 어학원에서 독일어를 가르치던 오스트리아인 줌파(Shumber)라는 사람이 뒤셀도르프 병원과 일을 꾸며 간호사 150명 보낸 일이 있었다. 그런데 줌파가 이때 1인당 150~200불씩 수수료를 챙긴 일이 뒤늦게 발각돼 경찰의 조사를 받고 결국 한국에서 추방되었다. 조선일보가 이 사실을 폭로함에 따라 검찰에서 입건한 것이다. 그런데 조선일보의 보도가 국내에 그치지 않고 그 내용이 독일로 전해졌다. 프랑크푸르트 룬트샤우가 조선일보를 인용 보도하면서 슐타이스 병원장과 이수길도 부정한 돈을 받지는 않았는지 모르겠다는 기사를 써 애꿎은 우리만 명예가 실추되었다. 줌파를 통해서 독일에 들어온 간호사들은 대부분 나에게 신청했다가 불합격된 사람들이었다.

또 한국간호사의 독일취업에 관여한 사람 중에 이종수 박사도 있는데 이종수 박사는 이수길 박사보다 더 많은 간호요원들을 독일에 취업시킨 걸로 안다.
이종수 박사의 활동에 대해서 아는 대로 소상히 밝혀 달라.

_ 같은 해 6월에 제 3차 간호사들이 들어 왔는데, 부터탈 시립병원 외과 수련의로 있던 이종수 박사가 7월부터 한국간호사 취업알선 일을 시작했다. 그는 바트 크로이츠나하 병원협회 재무과장과 함께 ‘코리아 디아코니’를 창설하고 간호사들을 노르트라인 베스트팔렌주과 베를린 등지에 공급하기 시작했다. 이 단체를 우리말 표기로는 ‘한국난민구제회’라고 칭했다. 그런데 이종수 씨는 간호사들에게 일정액을 갹출하여 한국에 난민구제병원, 즉 영세민, 부랑자 등 사회적 약자를 위한 병원을 짓겠다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그 재원을 마련하는 방법으로 자신을 통해 취업한 간호사 또는 간호조무사들에게 매월 40마르크씩을 봉급에서 원천징수하겠다는 것이었다. 이종수 씨는 이 문제로 주독 대사관 노무관을 찾아가 사업계획을 설명하고 대사관으로부터 허가를 받아 내었다. 이 사실이 한국의 보사부에 알려졌다. 보사부는 40마르크가 너무 많으니 25마르크로 하라고 액수를 줄여주었다. 25마르크 중 5마르크는 회비이고 20마르크가 병원건립기금이었다. 간호사들의 월급에서 빠져 나가는 기금은 모두 슈트르가르트의 디아코니로 입금되었다.

계약기간 3년간 모금된 기금 총액이 약 41만 마르크에 달한다. 그리고 이종수 씨는 이 돈 가운데 14만 마르크로 1970년 서울근교에 12만평의 땅을 샀다. 병원부지로 구입한 것이다. 그러나 그 후 병원은 건립되지 않았다. 그 땅이 지금도 있다면 아마 수 천억 원은 족히 될 것이다. 그런데 이 막대한 돈이 어디로 갔는지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
(참조:간호사들의 월급에서 원천 징수된 병원건립기금의 행방이 밝혀져야 한다고 공개 해명을 촉구하는 사설이 재독동포 계간지 ‘한독레포드(발행인 임석훈)’ 2000년 6월 20일자 ‘신뢰는 사회의 기본덕목이다’, ‘사회지도층은 모범을 보여야 한다’에 실렸다.)
1969년 3월21일자 한국일보  - 한국간호사들이 3년간의
<br />계약기간 무시하고 제 3국으로 빠져나간다는 기사. ⓒ이수길
1969년 3월21일자 한국일보 - 한국간호사들이 3년간의
계약기간 무시하고 제 3국으로 빠져나간다는 기사. ⓒ이수길
어떻게 이 같은 내용을 상세히 알고 있는가.

_ 사람들이 자꾸 나보고 착복을 했다고 하니까 (실상을 알기 위해서) 할 수 없이 내가 직접 슈투트가르트 디아코니에 문의 편지를 보냈다. 모금된 액수가 얼마나 되는지 그리고 그 돈을 어디에 썼는지 또 예정대로 병원을 설립했는지 소상히 밝히라고 요구했다. 그러자 슈투트가르트 디아코니에서 이종수 씨에게 편지를 보내 이 같은 사실을 알리고 이종수 씨로 하여금 그에 대한 답변을 하도록 요청했다. 이에 따라 이종수 씨가 그 내역을 보내왔는데 당시 내가 한독협회 회장이었으므로 질의에 대한 회신을 피할 수 없었을 것으로 본다. 이종수 씨가 보내온 공한은 한독협회장한테만 보낸 것이 아니라 슈투트가르트 디아코니, 본 대사관 등에 일제히 편지를 발송한 것으로 알고 있다.
이종수 씨는 한국에서 간호사를 선발할 때 해외개발공사와 함께 난민구제회가 참여케 했다. 이때 지원자들 난민구제회 기금조성 명목으로 기부금을 받아냈는데 이 같은 선발 방법이 부당하다는 기사가 연일 동아일보에 보도 되었고, 결국 이종수 씨 내외가 검찰 조사를 받게 되었다.

당시 ‘난민구제회’는 본(Bonn)에 본부가 있었고 서울에 지부가 있었는데 주로 부인, 형제 등 가족들이 운영했다. 이종수 씨는 간호사 송출사업을 위해 여행사도 경영한 것으로 알고 있다. 그래서 나처럼 128명 단위로 간호사가 들어온 것이 아니라 형편 되는 대로 20명, 30명씩 보낼 수 있었다.
당시 언론에서는 ‘파독간호원 사기’라고 크게 보도했는데 이와 더불어 세간에서는 이수길도 마찬가지라는 소문이 돌았다. 나는 이를 지켜보다 못해 동아일보에 ‘나와 이종수의 난민구제회와는 아무런 관계없다’는 해명 기사를 내기도 했다.
(참조:1) 기독교난민구제회(독일명칭은 Diakonische Gesellshcaft fuer Korea e.V.)에서 추진한 간호사 서독 취업의 사기행각에 관한 기사는 동아일보 1966년 12월 10일자(‘인력수출 사기행각’, ‘간호원을 고아라 속여’), 12월 13일자(‘파독간호원 사기’, ‘피해자 속속 늘어나’, ‘검찰서 강력수사 지사’) 등 이 기간 중 연일 관련기사 일간지에 보도되었다. 2) 이수길 씨가 난민구제회와 관련이 없다고 발표한 기사는 동아일보 1966년 12월 21일자 ‘서독 라인란트팔츠 주로 초청될 간호사들에게’)

이 구제기금은 사회복지를 위한 공금인데 정작 기금을 조성한 간호요원들의 입장이 어떠한지 들어 볼 필요가 있다. 간호협회에서는 사라진 이 돈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가.
_ 그 돈이 어떻게 어떤 목적으로 사용되었는지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 그리고 간호협회 내에서도 의견이 서로 다른 것 같다. 어떤 이들은 이 사실을 분명하게 밝혀야 한다고 주장하는가 하면 다른 이들은 이미 지나간 일인데 이제 밝혀 봐야 무슨 소용이 있냐는 정서도 있는 것 같다.
1972년 5월8일자 독일 시간주간지 슈피겔 광고문. ⓒ이수길
1972년 5월8일자 독일 시간주간지 슈피겔 광고문. ⓒ이수길
간호사들은 병원근무 등 독일 생활에 적응을 잘 했나. 독일병원 측의 평가는 어떠했나. 이 점은 한국간호사 독일취업이라는 업적을 이룬 이 박사로서는 매우 중요할 것 같은데.

_ 제 1진에 대한 독일병원의 평판은 매우 좋았다. 그래서 계속 더 많은 한국간호사를 원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2진, 3진이 연속해서 들어오면서 간호사들 간에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싸움도 자주 일어났고 이런 저런 말썽이 생겼다. 그러나 이런 사소한 것보다도 크게 문제로 부각된 것은 바로 간호사들이 계약을 이행하지 않고 중도에 일방적으로 병원을 떠나는 일이었다.

프랑크푸르트 시는 6월에 들어온 제 3차에 이어 제 4차 간호사 128명을 또 신청했다. 그런데 이 때 벌써 각 병원마다 다수의 간호사들이 미국으로 빠져 나가기 시작했다. 미국에서 온 취업 브로커들이 한국의 간호사들을 미국으로 빼돌리고 있었던 것이었다. 계약 위반도 아랑곳 하지 않고 이 같이 부끄러운 행태를 보이자 독일 병원들은 이내 한국간호사들에게 실망했다. 이에 따라 프랑크푸르트 시는 제 4차 간호사 취업 건을 취소시켰고 이후 프랑크푸르트는 더 이상 한국간호사를 받지 않았다.
(참조 : 1969년 3월 한국일보는 독일 일간 Frankfurter Allegation을 인용하여 ‘한국간호사는 골칫거리’, ‘계약기간 어기고 미국, 캐나다로 빠져나가’, ‘이미 120명 이탈’이라는 기사를 발표했다.)

그 후 어떤 변화가 있었나.

_ 4차 간호사 취업 철회는 나를 힘들게 했다. 해외개발공사에 이 사실을 통보하자 공사 측은 이미 사람을 다 선발해 놓았는데 이제 와서 그러면 어떻게 하냐며 4차를 실행에 옮기지 못하면 나보고 손해배상을 하라고 보사부와 합세하여 윽박질렀다. 계약서에 그렇게 써 있다는 것이다.
다행히 제 4차와 5차 간호사들을 마인츠가 있는 라인란트팔츠 주에서 받아들이기로 해서 문제를 해결할 수는 있었다. 그러나 4차 간호사 취업초청 계획이 무산되면서 입지가 편치 못한 나는 차라리 간호사 파독하는 일에서 손을 떼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한국간호사를 취업시키는 일이 보람된 일이어서 프랑크푸르트에 와 있었는데 이 일이 더 이상 진행되지 않는다면 나보고 나가라는 말과 같은 것이기에 나는 마인츠 병원으로 돌아가기로 마음먹었다. 다시 마인츠 대학 주임교수를 찾아가 머리를 조아리고 받아 줄 것을 간청했다.

주임교수는 마인츠로 돌아오되 방사선과를 전공할 것을 권했다. 공부를 끝내고 전문의가 되면 소아방사선과를 맡길 테니 그걸 해보라는 것이었다. 소아과 전문의로서 방사선학을 더 공부해서 앞으로 소아방사선 분야에서 일한다면 나로서는 해볼 만한 일이었다. 해서 67년 4월 방사선과 전문의 공부를 시작하게 된다.
그러나 생활은 고달팠다. 방사선과에서 새로운 공부를 하면서 의사로서의 일을 해야 했고, 또 주말에는 간호사 일도 해야 했다. 하루 종일 공부와 일에 치여 살던 시절이었다. 그런데 방사선과 공부를 시작해서 두 달 정도 있다가 그해 6월 동백림사건이 터졌다.
간호사 파독과 관련하여 당시 한국기독교연합회(한기련)는 한국간호사의 독일취업을 반대하고 나섰다고 한다. 이 같은 사실이 한국사회에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은 것 같다고 이 박사는 말한다. 한기련에서는 한국의 간호사들이 한국의 환자들을 위해서 양성되었고 한국에서도 의료진이 모자라 쩔쩔매고 있는 상황에서 독일로 취업을 나간다는 것은 인도적으로 용납될 수 없다고 주장하면서 독일기독교연맹으로 하여금 독일에서 여론을 조성하여 한국간호사를 데려가지 못하게 해달라고 요청했다는 것이다. 이에 독일기독교연맹은 한기련의 요청을 받아들여 독일의 유력한 시사평론지 <슈피겔>지에 막대한 광고비를 들여서 독일병원이 한국의 간호사를 데려오는 일은 인도적 차원에서 못할 짓이라는 광고기사를 게재했다(1972년 5월 8일자).

이 같은 기독교계의 움직임 때문에 독일정부도 더 이상 한국간호사 취업을 허가하지 않게 되었다고 이 박사는 말한다. 그래서 이후에는 기존의 간호사들이 계약을 마치고 귀국하는 수만큼만 인원을 보충하는 수준에서 한국의 간호사 파독이 진행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도 1976년을 끝으로 더 이상 간호사가 독일에 들어오지 않게 되었다고 한다. 한국간호사 독일취업 인력송출은 1976년 5월 이후 완전히 종료되었다.

다음호에는 이수길 박사가 동백림사건을 만나게 되는 시점부터 고문현장의 증언, 독일정부의 구명운동과 독일로의 귀환 등과 함께 이 박사 개인에 관한 이야기를 싣는다. 이 박사는 현재 국가를 상대로 보상을 청구한 상태이며, 자서전 <실록 이수길>도 금년에 한국기자협회에서 발간할 예정이다.

 
TRACKBACK 0    COMMENT 0
  어느 공무원의 기억 [자료-펌]  +   [말하고 싶다.]   |  2009/01/27 18:42


나의 한국해외개발공사 근무시절 : 1962 - 1975


 한국간호사 서독파견교섭을 위하여 서독병원협회회장 초대

 

한국의 군사정부에서 외화획득사업으로 강력히 추진하든 서독으로의 간호인력과 광부파견사업을 당시 해외개발공사에서 맡게되였다. 당시 나는 공사의 개발실장직을 맡고있을때였다. 한국간호사를 필요로하는 많은 서독병원으로 간호이력을 수입.배정하는 업무를 담당하는 서독병원협회의 책임자를 서울로 초대하여 인력파견에 관한 협의와 협약을 체결하였다.

위사진에서 좌측의 두사람은 우리공사간부직원, 노동청 고용과장, 개발공사사장이든 김득황 박사, 서독병원협회회장, 노동청 노정국장, 서독병원협회에서 근무하든 ㅅ한국인직원 최기식씨내외 그리고 맨 오른쪽이 본인이다.


 초대 해외개발공사사장이든 함병선씨 (퇴역 육군중장)가 일본으로의 간호보조원연수생파견을 추진하든 이화대학의

이석곤교수를 초대하다.

 

국방부직속의 특수정보부대에서 근무하든 나는 과거에 한국군2군단 정보처에서 부리핑장교로 근무하며 면식이있든 당시 군단장이든 하병선중장이 퇴역하고 개발공사사장직을 맡으며 나를 불러 함께 일하자고하여 나도 군복을 벋고 합류하게되였다. 처음에는 비서실장으로 근1년 근무하다가 개발실장으로 전보되여 민간에서의 첫직장생활이 시작되였다.

서독으로의 간호요원과 관산인력의 송출로 공사업무가 바쁘게 돌아가든이, 1970년대들어 월남파병의 뒤를 이여 월남과 중동으로의 한국기술인력의 수요가 늘어 진출이 활발해저 이때부터 우리나라의 해외인력진출시대가 열리게되였다.

 맨왼쪽이 나, 다음이 공사 전무, 이석곤교수 그리고 두여인종업원사이에 있는 분이 함병선사장.

 

공사의 인력송출기념행사를 마치고 회사간부들과


당시 나의 소관업무는 해외고용주들를 찾아 우리나라 기술인력파견을 교섭하고 송출절차를 협의하게되는고로 늘 바쁜생활의 연속이였다. 때로는 유망한 고용주를 한국으로 불러들여 그들를 접대하고 우리인력에 관심을 가지게하는일이다.


 

한국광부의 서독송출를 촉진하기위하여 서독광산협회 와 노동성 담당과장을 초대하여 협의후 동해안관광여행

맨왼쪽이 나, 서독광산협회 책임자, 서독노동성 담당과장, 그리고 맨끝이 서독에서 유학하고돌아와 독일어통역으로 동행한직원


동해안 낙산사 근처에서

당시만해도 우리나라 관광지가 볼거리와 먹거리면에서 외국귀빈들에게 보여주기에는 좀 부족할때였다. 그때 여행을하면서 그들에게 아주 좋은 음식을 대접한다고 동해안 강능의 어느 호텔에서 튀김딹을 볼품없게 대접한게 지금도 씁슬한 추억으로 회상된다.


 제3대사장이든 한상준씨가 괌도에서 온 견설회사사장과 한국건설인력파견을 위한협의

 

1970년초반, 지금의 현대GROUP 전신인 현대건설이 괌도를 비릇한 해외건설사업진출이 한참 활발하게 진행될때였다.

우리공사도 당시 DILLIGNHAM 과 같은 굴지의 미국건설회사에 많은 인력을 보냈고, 미용사등의 취업이민도 개척할때였다.


 괌도에서 온 고용주를 안내하여 개발공사업무를 소개하다

 

외국의 유망고용주와 그들의 가족도 늘 함께 초대하여 융순히 대접하여 유대를 강화하다

이들 괌도에서 온 고용주를 통하여 많은 건설기술자와 취업이민으로 여자미용사를 내보낼쑤있었다.




 공사의 사장이 참석한 가운데 최종협의를 진행할때는 주무잭임자인 내가 늘 자리를 같이하여 경위를 설명하였다.

고용주들과 힘든 협상끝에 좋은 성과를 내여 우리 기술자들이 송출될때 나는 큰 보람을 느끼곤하였다.


 일본으로의 간호연수생파견을 추진하려고 온 나라현 의사협동조합의 '사꾸라이'회장을 김포비행장에서 배웅하면서

 

자국의 인력시장을 보호하기위하여 외국인력의 진출를 강력히 저지하는 일본에 연수생이라는 명목으로 우리 여자간호원들를

보내려고 최초로 시도하기로하고 일본 나라현 의사헙동조합회장과 만주에서 의대동창이든 이화여대의 이석곤교수를 통하여

사업을 추진하여 최초로 50여명의 고등학교 여자졸업생을 모집하여 우리정부의 복잡하고 까다로운 허가절차를 힘들게

거처서 성공하였고, 뒤를 이여 시마네현으로 남자 자동차정비연수생도 송출하였다.



 일본 나라현 의사협동조합의 회장과 연수생파견에 관한 최종협의를 마치고 공사부사장과

 

이들 간호연수생과 시마네현으로의 자동차연수생파견을 내가 전담하여 힘들게 성사한후 나는 이들 연수생수입선으로부터 초청을받아 일본현지에서 공부하며 취업하든 연수생들의 실태를 살펴보려고 약 2주간의 일본출장도 다녀왔다.



 외국에서 귀빈을 초청하여 영접할때는 공사의 여직원들도 한복을 곱게 잎혀 비행장등에 나가 꽃다달도 증정하곤하였다.


위사진은 서독에서온 귀빈들의 영접행사를 잘 마치고 서독에서 서독병원협회직원으로 근무하든 최기식씨내외와 기념사진.

그후 1974년초에 독일에서 근무하든 한국간호인력과 광산근로자들을 관리하기위하여 내가 독일 쾌론에 파견되여 지사설립업무를

수행할때 이들내외의 친절한 도음도 받았다.


 내가 개발공사의 이주과장 제직시 서울의 여행사관계자들과 어느호텔에서의 업무협의모임에서


재생

 해외출장길에 홍콩에서, 1974년

 

 공사의 동료직원들과

 

여러해 동안 내가 몸 담았든 우리나라의 해외인력진출의 물고를 튼 한국해외개발공사는 1975년 내가 해외로 파견나가 근무하다 미국에 정착한 2000년대에 들어와 '국제협력단' 이라는 이름으로 바뀌여 현제의 외교통상부산하 기관으로 개편되여 한국정부의 후진국지원기관으로 활동하고있다.


 
TRACKBACK 0    COMMENT 0
 
 
<<이전   | 1 | 2 |   다음>>
 

koitsch's Blog is powered by Daum & tistory